3줄 요약

  •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빌딩 앞에 설치된 조형물을 종종 보게 됩니다. 크기도, 재료도, 주제도 제각각이죠. 과연 누가 왜 이런 조형물을 설치했을까요?

  • 우리나라에는 연면적 1만㎡가 넘는 일정한 용도의 건축물에 미적인 작품을 설치해야 하는 독특한 제도가 있습니다. 이른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입니다.

  • 김효진 아트 컨설턴트가 최근 성수동에 문 연 스마트 오피스 ‘팩토리얼 성수’를 사례로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서울 도심을 방문한 해외 작가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습니다. “와, 예술 작품이 곳곳에 있네.” 실제로 한국에서 오피스, 아파트, 병원, 호텔 등 건물 앞에 설치된 예술작품들을 마주하는 건 우리 시민들에게 일상적인 풍경입니다. 이 예술 작품들은 장르도, 주제도 제각각입니다.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모르면 지나치고 말 수수한 작품도 있죠.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미술작품 ‘해머링 맨’. 22m 높이의 키네틱 조형물이 망치질을 반복한다. (사진출처=www.borofsky.com)

한국 도심의 독특한 풍경을 만드는 이러한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의해 설치됩니다. 과연 이 제도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도입된 걸까요? 모든 건축물에 적용해야 할까요? 제가 최근 아트 컨설팅을 담당한 성수동 오피스 ‘팩토리얼 성수’ 사례를 중심으로 건축물 미술작품 세계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가 뭔가요?

우선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1990년 중반부터 시행된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연면적 1만㎡(3025평) 이상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 일정한 용도의 건축물은 건축비의 1% 내에서 미술작품을 설치하거나, 미술작품 설치비의 70%를 문화예술진흥기금에 납부하도록 합니다.

이 제도는 도시환경에 문화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지역민에게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기회를 확대해서, 궁극적으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제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얼마짜리 미술작품을 설치해야 할까요? 이 금액 역시 문화예술진흥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건축물의 용도와 설치지역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건축물의 용도는 공동주택과 공동주택 외로 나뉘고, 설치지역의 적용 요율은 광역시와 도에 따라 다릅니다.

미술작품 설치금액 = 연면적 × 표준건축비 × 적용비율(용도와 지자체에 따라 기준상이)

※ 2024년 표준건축비: 2,319,000원/㎡
(2013. 12. 21 국토교통부 고시 “수도권 정비계획법” 제14조 규정)

예를 들어 서울의 연면적 1만 제곱 미터 신축 오피스 건물이라면,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하는 금액은 2024년 기준 약 1.7억입니다. 건축주는 이렇게 산출된 법정금액 이상을 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하고, 선정된 작품은 해당 지역 심의를 받습니다. 지역 심의는 건축물에 설치하는 미술작품에 대한 예술성, 공공성, 가격 적정성 등을 평가하죠. 심의를 통과한다면 건축주는 준공까지 작품을 설치해야 합니다.

보통 건축물 미술작품은 건축물 외부에 조각이나 벽화로 설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건축물 내부에 회화, 미디어, 사진, 행잉, 공예 등 다양한 종류로 설치될 수도 있습니다.

오피스 건물에 설치한 회화 작품. ⓒGroundA

작품 가치 상승까지 기대된다면 금상첨화

건축물 미술작품은 건축물을 오가는 시민이 마주하는 공공 작품이자 그 장소와 조화를 이뤄야 하는 장소 특정적 작품입니다. 이 의도가 잘 작동한다면, 미술작품은 명소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가면 그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기억을 시민 혹은 방문객에게 남기는 것이죠. 건축물 아트 컨설턴트 입장에서 시민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그 장소, 그 공간을 방문할 때 큰 보람을 느끼죠.

최근에는 건축물의 가치뿐 아니라 건축물 미술작품의 가치까지 향후 상승하길 기대하는 건축주가 많습니다. 즉, 구색 맞추기 식 미술작품이 아니라 작품의 자산가치를 고려한 수준 높은 작품들을 건축물에 설치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인데요.

그 배경에는 가파르게 성장한 한국 미술 시장이 있습니다. 미술작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거래가 활발해지자 미술작품에 대한 투자적 관점이 늘어나면서 미술품을 하나의 ‘자산’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긴 겁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건축물 미술작품에도 영향을 주게 된 것이죠.

팩토리얼 성수에 설치된 예술 작품

지난 2월 서울 성수동에 오픈한 ‘팩토리얼 성수’는 심의에서 건축물 미술작품의 취지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방문객에게도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미술작품을 설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팩토리얼 성수는 로봇 주차를 비롯해 최신 기술이 적용된 이른바 ‘테크 레디’ 오피스 건물입니다. 성수역에서 20~30m 떨어져 있는 동시에 연무장길 메인로드의 시작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상당히 많은 편이죠. 그렇기 때문에 젊고, 에너지가 넘치고, 미래가 기대되는 성수동의 고유한 색깔을 예술품에도 담고 싶었습니다.

<규칙과 불규칙의 리듬>
작가 | 빠키

팩토리얼 성수의 공개 공지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나무 그늘과 벤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휴식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만남의 장소가 되지요. 이 장소에 설치한 작품은 바로 빠키 작가의 조각품입니다.

빠키는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과 헤이그 왕립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입니다. 영상, 인터랙티브 미디어, 설치 작품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작품을 만들죠. 서울 명동 애플 스토어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작가는 화려한 색감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하나의 유닛으로 삼아 반복하는 시각 언어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특유의 유쾌한 에너지가 팩토리얼 성수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공개 공지에 설치된 빠키의 조형물. 성수동 분위기에 맞춰 밝고 유쾌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groundA

<Moving Lights on wall 2023-01>
작가 | 정정주

팩토리얼 성수는 최신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오피스입니다. 지하증에서는 로봇이 주차를 대신해주고, 라운지에서는 로봇이 커피와 택배를 나릅니다. 회의실의 온도는 이용자가 앱 하나로 쉽게 조절할 수 있고요.

그렇게 때문에 이러한 기술과 어울리는 ‘미디어’ 작품을 찾아보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설치 장소는 1층 출입구 근처와 엘리베이터 벽면 등 다양한 공간을 놓고 논의한 끝에 로비 기능을 하는 지하 1층 라운지 벽면을 선택했고요.

많은 미디어 작가 중 정정주 작가는 오랫동안 일관되게 공간과 빛, 시점의 관계를 다뤄왔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었습니다. 팩토리얼 성수에 설치된 그의 영상 작품은 일상 속 어느 공간에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선을 달리해 보여주는데요. 작품이 설치된 지하 1층에 차분한 입체감을 불어넣어 마치 미디어 작품이라기 보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 밖 풍경을 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착각을 유도합니다. 라운지 인테리어와도 조화를 잘 이룬다는 평가입니다.

지하1층 라운지에 설치된 정정주 작가의 영상 작품. 자연광을 끌어들인 창문처럼 주변을 밝고 편안하게 만든다. ⓒgroundA

<무제 Untitled>
작가 | 오세열

팩토리얼은 이지스자산운용의 중소형 스마트 오피스 브랜드로, 오피스 브랜드 상표 출원을 마쳤습니다. 연면적 3 만㎡이하 중소형 빌딩을 대상으로, 스마트 기술을 접목한 업무 공간을 제공하죠. 수학 함수에서 착안한 팩토리얼(Factorial, 기호 “!”)은 가능성(0)에 아이디어(!)를 더해 새로운 것을 창조(0=1!)하는 공간이라는 뜻인데요.

이러한 함축적 언어를 암시하는 작품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어느 기업이 본사와 지점들에 동일한 작가의 작품들을 걸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를 브랜딩에 활용했다는데, 이를 팩토리얼에도 적용해보고 싶었습니다. ‘팩토리얼 브랜드를 상징하는 예술 작품으로는 무엇이 좋을까?’ 고민한 끝에 숫자나 문자가 들어간 기호학적인 회화가 떠올랐습니다.

오세열 작가는 ‘암시적 기호학’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무제>는 하얀 칠판에 검은 분필로 낙서한 듯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숫자들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팩토리얼 브랜드를 시각화해 제작했습니다. 캔버스 위 빼곡하게 채워진 숫자들은 팩토리얼의 수학적 기호를 연상하게 합니다. 언뜻 보면 낙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두텁게 바른 물감을 긁어 숫자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두가지 색을 겹겹이 발라 레이어를 만든 후 나이프를 이용해 긁어 이미지를 완성한 작품입니다.

오세열 작가의 회화 작품. 캔버스 위 빼곡하게 채워진 숫자들이 수학 함수에서 착안한 건물명 팩토리얼을 연상시킨다. ⓒgroundA

마치며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명암이 있습니다.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제도를 따르기 위한 형식적인 작품이 설치되거나, 제작 과정에서 비리 문제가 발생하거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 도시의 흉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 작동하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예술이 개입하여 일관성 있는 주제의 예술 경험을 만들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이죠. 성수동과 건물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공공 예술로 표현한 팩토리얼 성수가 그 예가 되길 기대합니다.

독자분들도 이제 팩토리얼 성수를 지나갈 때면 이전과 다른 눈으로 작품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팩토리얼 성수에서 작품 선정과 설치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기대와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grou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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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내용은 2024년 6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시장 환경 등에 따라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