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산타바바라는 1925년 대지진 이후 도시 전체를 ‘스페인 식민지 양식’으로 통일해 재건한 미국 도시로, 공항 하나까지 엄격한 경관 심의를 거치는 강력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운영합니다.

  • 산타바바라의 경관 규정은 아치와 기와 같은 외관 통제에 그치지 않고, 발코니·중정·보행로처럼 사람의 행동까지 설계에 담아 ‘2차원 외관’을 ‘3차원 생활 경관’으로 완성합니다.

  • 통일된 경관은 주민의 자부심과 자발적 질서를 이끌어내며, 초기 집객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는 도시가 되려면 엄격한 가이드라인의 수립과 운영·관리가 핵심입니다.

트루먼 쇼는 세트장이 아니었다

영화 <트루먼 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마을을 기억하는가? 평범한 남자의 삶이 알고 보니 거대한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리얼리티 TV 쇼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설정 탓에 당연히 영화를 세트장에서 촬영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배경은 미국 플로리다주에 실존하는 ‘씨사이드(Seaside)’라는 마을이었다. 설명을 듣고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파스텔 톤의 예쁜 집들과 동화 같은 거리가 지나치게 완벽하고 계획적으로 보였으니까. 

씨사이드가 부자연스러운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통일성’ 때문이다. 누군가 치밀하게 연출해 도시에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한 느낌 말이다. 도시는 어느 정도의 혼돈이 불가피하다. 예쁜 집과 못생긴 집이 뒤섞이고, 전봇대 아래에는 쓰레기봉투가 쌓이기 마련이다. 이런 혼돈을 자연스럽게 여기다 보니, 씨사이드의 과도한 통일성을 보면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눈으로 보기에 통일감이 있고 아름다운 도시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칠까? 깨끗한 도시에 살면 트루먼 쇼의 단역 배우들처럼 만면에 미소가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중도시의 매력을 살펴보는 시리즈에서 던지는 오늘의 주제, ‘도시 경관의 통일감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누군가 치밀하게 연출한 통일성. 1998년 개봉작 <트루먼 쇼>의 배경이 된 플로리다주 ‘씨사이드(Seaside)’의 흠잡을 데 없는 거리는 도시의 자연스러운 혼돈에 익숙한 우리에게 묘한 이질감을 준다. (출처=IMDB)

2주 동안 트루먼이 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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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도시 산타바바라에서 2주간 머물렀을 때, 내가 바로 그 트루먼이 된 기분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사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더니, 부드러운 크림색 페인트를 칠한 벽이 끝없이 이어지고 1층에는 아치형 회랑이, 지붕에는 오렌지색 스페인 기와가 얹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첫눈에는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었지만, 완벽하게 세팅된 탓에 간간이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산타바바라 공항마저 스페인풍 저택처럼 만들었으니, 말 다 했다. 한편 함께 여행하던 누나가 공항을 보더니 자신이 봤던 공항 중 가장 아름다운 공항이라 감탄하는 것이 아닌가. 건축가인 내 눈에는 트루먼 쇼의 일부처럼 보여 거부감이 들었지만,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누나에게는 공항 하나까지 놓치지 않은 정체성이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공항의 차가운 금속성 외관 대신, 스페인풍 저택으로 디자인되어 동화 같은 첫인상을 주는 산타바바라 공항. (사진=Paul Wellman)

지진이 만든 스페인풍 도시

산타바바라는 도시 경관의 일관성을 ‘스페인풍’이라는 하나의 스타일을 적용해서 만들었다.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1925년, 산타바바라에 최악의 대지진이 발생해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전문가들은 즉시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린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철과 유리로 된 차가운 현대 도시 대신, 소위 ‘스페인 식민지 양식’을 적용해 도시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산타바바라는 18세기 후반 스페인의 식민지 거점이었다. 당시 원주민을 동원해 지은 아름다운 스페인풍 성당(미션)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스페인 본토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식민지 현지에 맞게 다소 단순화한 것이 스페인 식민지 양식이다. 도시 계획가들은 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바탕으로 도시 전체의 외관을 통일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은 지금도 유효해서, 도심지에 건물을 지으려면 이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주택을 짓든 햄버거 가게를 짓든 스페인풍 기와를 얹고 경관 심의를 거쳐야 한다.

캘리포니아의 푸른 하늘 아래, 붉은 기와지붕과 부드러운 크림색 벽면이 끝없이 이어진다. 경관이 통제된 산타바바라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을 상징하는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그라나다 극장(Granada Theatre). (사진=Tony Hisgett)
스페인 식민지 부흥 양식(Spanish Colonial Revival)의 원형. 하얀 외벽과 붉은 기와지붕이 돋보이는 이 성당은 오늘날 산타바바라 다운타운 전체를 뒤덮은 디자인 가이드라인의 역사적 뿌리다. (출처: celebritycruises.com)

빨간 건물 하나가 도시를 망칠 수 있을까

도시의 외관을 연구하는 분야를 ‘도시 경관(Urban Landscape)’이라 한다. 좋은 도시 경관을 가꾸는 일은 인간이 외모를 가꾸는 일과 비슷하다. 사람이 더 나아 보이려면 타고난 외모 외에, 옷도 사고 미용실에도 가고 체육관에서 몸도 다듬어야 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저 사람 멋지네’라는 소리를 듣듯, 도시도 자신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요소를 종합적으로 꾸며야 멋진 도시가 된다. 건축물, 자연 지형, 도로 선형, 다리, 색채… 간판 같은 소소한 것까지 포함한다. 도시 경관 전문가들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도시 본연의 개성을 이해한 후, 미래에 변화해 나갈 경관의 큰 틀을 짠다. 

여기서 한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개별 건물의 건축주는 대개 자신의 건물에만 관심이 있다. “내 건물 내가 빨갛게 칠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여기서 독자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내 집 지붕 색깔 하나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만 우아하게 통일된 마을에 살 것인가, 아니면 조금 지저분하더라도 내 취향껏 꾸밀 수 있는 자유로운 혼돈을 택할 것인가? 

경관 연구자 입장에서는 튀는 빨간색 건물 하나가 도시 전체의 그림 속에서 조화로운지, 아니면 경관을 망치는지를 고민한다. 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조율해 도시 전반의 경관을 일관되게 만드는 일이 도시 경관 연구자들의 큰 숙제인 것이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차원 외관에서 3차원 생활 경관으로

산타바바라의 과도한 통일성에 반감을 품던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2주 정도 머물러보니, 둥근 아치벽이 만드는 그늘을 따라 걷고, 스페인풍 중정에서 커피를 마시는 아침 시간이 즐거웠다. 중정을 둘러싼 크림색 벽은 햇빛을 적절히 반사해 눈부심을 줄이고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외관만 눈에 들어왔지만, 살다 보니 일관된 경관이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산타바바라의 경관 규정은 단순히 아치를 만들고 기와를 얹는, 건축 표면의 규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치 안쪽에 발코니 공간을 만들고, 도로를 중정으로 연결하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걷고 머물게 한다. 공간이 유발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도시 경관의 일부가 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캘리포니아의 햇빛을 받아 왕성하게 자라는 식물들이 통일된 외관에 다양성을 더해, 도시가 얄팍한 세트장처럼 보이지 않도록 돕고 있었다. 2차원 외관 경관이 3차원 생활 경관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엄격하게 통제된 스페인풍 건축물들 사이로 가로수와 덩굴식물이 어우러져 통일된 경관 속에 다양성을 더한다. 생명력 넘치는 거리는 세트장 같은 지루함을 지우고, 사람들을 테라스와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사진=Benoit Debaix)

아산 지중해 마을이 두 번째 방문을 만들려면

특정 스타일로 정체성을 만든 도시는 한국에도 있다. 근래 화제가 된 아산 지중해 마을이 그렇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푸른 돔과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을 가져와 동네를 꾸몄다. 건축가로서 사진을 보고 받은 첫인상을 털어놓겠다. 솔직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스 섬마을의 양식을 한국의 평지에 옮겨 놓은 전형적인 키치(Kitsch) 건축1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면을 알고 나니 마냥 비판만 하기도 어려웠다. 신도시 건설로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이 조합을 만들고 상업 시설을 활성화하기 위해 절박하게 선택한 생존 전략이 바로 이 서양식 경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상 방문해 보니 생각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1층 가로는 보행 친화적이었고, 상층부에는 주거를 배치해 자생적인 배후 소비층을 만들어 낸 훈훈한 마을이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도 있다. 통일성 중심의 화려한 경관은 초기 집객에 큰 위력을 발휘하는 가성비 좋은 유인책이다. 하지만 그 약효는 매우 일시적이어서 사람들을 두 번 오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국적 외관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남해 독일마을 등 국내 테마 마을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산타바바라처럼 사람의 행동까지 포함한 경관을 만들어야 한다. 1층에 처마를 두어 보행자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중정을 만들어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공간을 만들자. 외관뿐 아니라 건물의 안쪽 공간에도 그리스 섬마을이 가진 인간적인 풍취를 담아내는 것이다. 도시도 인간과 같다. 외모와 내면이 일치할 때 멋진 인격체 하나가 완성된다.

아름다운 동네가 착한 이웃을 만든다

사실 리얼리티 쇼의 꾸며낸 연기가 아니라면 트루먼 쇼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훌륭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마을에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들이 사는 곳이 이 마을이다. 이런 성정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배경을 찾다 보니 선택한 것이 통일감 있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통일되고 아름다운 도시 경관은 거주자를 변화시킬까? 당연히 그렇다. 다만 그 긍정적인 변화는 단순히 ‘예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착해진다’는 식의 1차원적 감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동네가 시각적으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정돈되어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비로소 타인에게 너그러워진다. ‘우리 동네는 특별하고 아름답다’는 합의된 자부심은, 주민들이 스스로 골목에 휴지를 버리지 않고 내 집 앞 화단을 한 번 더 가꾸게 하는 자발적 질서로 이어진다. 그 참여와 자부심을 만드는 수많은 경관 기법 중 하나로, 산타바바라의 스페인풍이 있는 것이다.

아산 지중해 마을의 이국적인 겉모습 이면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이 상업 부흥을 위해 만든 고민이 담겨있다. (사진=조성익)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경관 가이드라인이 부동산 가치를 지키는 법]

통일된 경관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사례는 어디일까? 디벨로퍼라면 디즈니가 플로리다주에 기획한 ‘셀레브레이션(Celebration)’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디즈니가 기획한 플로리다의 계획도시 ‘셀레브레이션(Celebration)’. 형태만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주민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유지보수 기준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셀레브레이션은, 시간이 지나도 경관이 오염되지 않고 우아하게 유지되는 마스터플랜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진=Rich Pope / Orlando Sentinel)

고전주의 스타일로 경관을 통일한 이 계획도시는 건축가 로버트 A.M. 스턴 등 저명한 건축가들이 참여해 완성되었다. 한때는 과거를 흉내 낸 진부한 세트장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실거주자들의 높은 만족도와 부동산 가치 상승 덕분에 최근 ‘인간적인 디자인’의 모범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국내 신도시나 테마 마을 개발에 이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외관의 껍데기를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서려면, 셀레브레이션이 30년 가까이 동일한 경관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일회성 건설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독하리만치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지켜낸 결과다.

결국 경관을 활용한 도시 개발은 ‘어떻게 짓는가’만큼이나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하는가’가 핵심이다.


  1. 저속함, 상투성, 모방을 의도적으로 활용하여 대중적인 유희를 이끌어내는 건축 양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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