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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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취리히는 1인당 에너지 소비를 2,000와트 이하로 줄이되 삶의 질은 유지하는 ‘2,000와트 사회’를 시민투표로 채택한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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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의 핵심 전략은 시민에게 절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좋은 보행 인프라와 고효율 건축으로 도시의 에너지 ‘기본요금’ 자체를 낮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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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도덕심이 아닌 도시의 인프라가 친환경 시민을 만든다는 취리히의 교훈은, 한국형 ‘2,000와트 구역’ 실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분리수거에 진심인 한국인, 스위스에 가면 놀라는 이유
미국에 몇 년 사는 동안 가장 의아했던 것 중 하나는 이 나라 국민들, 대체 분리수거 개념이 없다는 점이었다. 별도의 음식물 쓰레기 봉투도 없지, 콜라 캔부터 고장 난 가전제품까지 거대한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으면 그만이지. 페트병 라벨까지 떼어낼 정도로 깐깐한 분리수거가 일상화된 한국 사람 입장에선,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스위스 시민이 한국에 온다면 아마 다른 차원의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친환경이 쓰레기를 분류하는 개인의 고단한 실천에 기대고 있다면, 스위스의 친환경은 애초에 개인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도시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굳이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아도 쾌적하게 닿는 대중교통, 냉난방 에너지를 줄여도 사계절 내내 아늑한 건축물까지.
우리의 일상을 바꿔주는 세계의 중규모 도시(Mid-sized City)를 탐구하는 연재. 이번 글의 목적지는 지구를 깐깐하게 챙기는 것이 오히려 시민에게 가장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선물하는 방법임을 증명한 도시, 취리히다.

기본요금을 깎아주는 2,000와트 사회
취리히의 거리를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길을 건널 때마다 보행 신호등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녹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운이 좋아 그런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단순히 보행 신호 시간이 유난히 긴 것이 이유였다. 어찌나 자주 보행신호로 바뀌는지, 대기 중인 자동차 운전자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도시를 걸어 다니고 내린 결론은 이랬다. 만약 취리히에 살게 된다면 웬만해서는 차를 끌고 나오지 않으리라. 더운 여름날 횡단보도 앞에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다. 노면 전차도 도심 곳곳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차를 운전하는 일보다 걷는 것이 훨씬 우대받는 느낌이다. 환경을 위해 억지로 차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행자의 삶이 더 편하고 매력적이라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놓게 되는 도시 구조다.
취리히는 1인당 에너지 소비를 선진국 평균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이자는 이른바 ‘2,000와트 사회(2,000-Watt Society)’1를 선언했다. 이 개념을 우리도 꼭 이해했으면 좋겠다. 2,000와트 사회란 한 사람이 매 순간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에너지를 2,000와트 이하로 유지하며 살아가자는 개념이다.
2,000와트? 헤어드라이어 하나를 강풍으로 틀면 대략 2,000와트다. 즉, 내 삶의 모든 행위를 합친 에너지가 평생 드라이어 1개를 켜 둔 수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에너지 총량에는 숨만 쉬고 있어도 빠져나가는 기본 에너지가 포함된다. 집의 냉난방, 타고 다니는 자동차, 먹는 음식, 입는 옷의 생산과 폐기, 매일 걷는 도로와 가로등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까지. 비유하자면 택시를 타자마자 미터기에 찍히는 기본요금 같은 것이다.
만약 효율이 엉망인 건물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 산다면, 이 기본요금만으로 이미 수천 와트를 훌쩍 넘겨버린다. 시민들은 2,000와트를 맞추기 위해 샤워 후 수건으로 물기를 바짝 닦아내고 약풍으로만 드라이어를 켜며 벌벌 떨어야 할지도 모른다.
취리히의 해법은 시민들에게 ‘궁상맞은 절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걷기 좋은 길을 깔아 자동차 에너지를 없애고, 친환경 고효율 건축물을 지어 미터기의 기본요금 자체를 획기적으로 낮춰준다. 개인의 인내심이 아니라, 잘 설계된 공간의 효율로 2,000와트를 달성하는 것. 이것이 취리히 시민들이 환경에 대한 죄책감 없이 가볍게 일상을 누리는 비결이다.

자동차를 몰면 1,500와트, 트램을 타면 500와트
그렇다면 이 마법 같은 ‘기본요금 할인’은 시민 일상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앞서 횡단보도 신호등에서 겪은 일을 2,000와트 미터기에 대입해 보자. (정확한 수치라기보다는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다.)
만약 저녁 약속을 위해 꽉 막힌 도심으로 중형차를 혼자 몰고 나오는 순간, 당신의 에너지 미터기는 이미 2,000와트를 향해 무섭게 치솟는다. 취리히처럼 트램을 타기 위해 기분 좋게 걸어 나온다면 500와트면 충분하다.
메뉴 선택도 마찬가지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소고기 스테이크를 써는 순간, 막대한 운송 에너지가 더해져 1,000와트가 쉽게 날아간다. 반면, 취리히 인근에서 갓 수확한 채소 요리가 나오는 근사한 로컬 식당을 찾는다면 그 음식에 청구된 에너지는 500와트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2,000와트라는 엄격한 목표는 개개인에게 “차를 타지 말고 맛없는 것만 먹어라!”라고 강요해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 운전보다 걷는 게 편하고 즐겁게끔 보행 인프라를 깔고, 로컬 농산물이 수입 식재료보다 더 신선하고 맛있도록 지역 유통망을 보완해야 한다. 2,000와트 사회란 시민의 얄팍한 도덕심이나 인내심에 호소하는 흔한 환경 캠페인이 아니다. 시민들이 기꺼이 친환경적인 삶을 선택하도록 도시의 인프라와 시스템을 근본부터 혁신하겠다는 대담한 선언이다.
콘크리트 대신 목재를 선택한 직장인의 하루
이 대담한 혁신 도시에 살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이 바뀔까? 취리히에서 직장을 다닌다고 가정하고 하루를 따라가 보자.
일상에서 시민의 에너지 미터기 요금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주범은 다름 아닌 건축물이다. 만약 에너지를 펑펑 쏟아부어 지은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으로 출근한다면, 아침에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순간 이미 2,000와트 예산의 절반이 훌쩍 날아가 버린다.
취리히 도심에 위치한 미디어 기업 타메디아(Tamedia) 사무실로 출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건축가 시게루 반(Shigeru Ban)이 설계한 이 건물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 뼈대가 만들어내는 웅장한 내부 풍경에 압도된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강도 문제 탓에 콘크리트 뼈대 위에 덧붙이는 마감재 정도로 쓰이지만, 이곳은 특별히 가공한 목재를 사용해 건물의 뼈대 전체를 나무로 짜 맞췄다. 건설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가장 적고 재생까지 가능한 목재를 핵심 구조재로 쓴 덕분에, 이 건물은 그 안에 머무는 직장인들의 에너지 기본요금을 획기적으로 낮춰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목구조가 단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기능적 선택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잠시 1층 로비에 앉아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거대한 목재 조인트의 비례를 펜으로 쓱쓱 따라 그리다 보니, 콘크리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나무 특유의 밝고 건강한 기운을 흡수하는 기분이었다. 실내외 온도차를 줄이기 위해 설치된 테라스에 앉아 도시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확신이 들었다.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지어진 친환경 건물이 역설적으로 가장 근사하고 쾌적한 오피스가 된 것이다.

0.2평을 양보하고 도시를 앞마당으로 얻는 법
퇴근 후 돌아가면 어떤 집이 기다리고 있을까?
친환경 주거 건물 칼크브라이테(Kalkbreite)를 방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투톤으로 마감된 외장재와 건물의 비례감이 아름다워 건축가의 본능적 호기심에 이끌려 무작정 들어간 건물이었다.
내부의 쓰임새가 범상치 않았다. 알고 보니 2,000와트 사회 기준에 맞춰 지은 협동조합 주택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조합을 꾸려 설계 단계부터 참여했기에, 이윤만 좇는 기존 자본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과감한 공간 실험이 가능했다.
이 아파트가 에너지 기본요금을 낮추기 위해 택한 전략은 ‘공유를 통한 공간의 럭셔리’다. 취리히의 일반적인 아파트보다 개인의 거주 면적은 다소 작다. 대신 다른 점이 있다. 내 집 한구석에 좁은 놀이방을 답답하게 욱여넣지 않고, 단지 한가운데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거대한 중정과 훌륭한 공동 놀이방을 열어두었다. 구내식당은 물론이고 넓은 공용 재봉실까지 갖추고 있다.
재봉틀을 돌리기 위해 방문을 나서는 것을 굳이 ‘불편함’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내 집의 평수를 조금 줄인 대가로, 언제든 이웃과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확장된 작업실을 얻은 셈이다.
실제 주민들은 이 절약을 위한 공유에 실제로 만족하고 있을까? 현지 매체에 실린 한 주민의 인터뷰는 친환경 시대를 살아가는 취리히 시민들의 ‘쿨한 마인드’를 대변한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제 개인 공간 외에 0.8제곱미터(약 0.2평)에 해당하는 임대료를 조금 더 내고 있습니다. 만약 이 면적을 내 방 안으로 가져왔다면 기껏해야 의자 하나를 더 놓는 데 그쳤겠죠. 하지만 저는 그 비용으로 근사한 구내식당과 넓은 로비, 훌륭한 공용 공간 전체를 제 앞마당처럼 누리고 있어요. 사유 공간을 아주 조금 양보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 셈이죠.” (칼크브라이테 현지 주민)


넘치는 도시 대신 덜어내는 도시
물론 이 글을 읽고 ‘아, 나도 훌륭한 친환경주의자가 되기 위해 당장 취리히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하는 뉴욕, 파리, 런던 같은 위대한 도시들은 하나같이 그 경제적, 문화적 풍성함으로 유혹한다. 우리가 동경하는 꿈의 도시란 ‘넘침의 도시’다. 취리히는 ‘덜어내는 도시’가 어떻게 삶을 멋지게 바꾸는지 이야기한다.
오래된 변전소와 버려진 컨테이너를 근사하게 업사이클링한 코워킹 카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에서 커피를 마시고, 굳이 인공조명을 켤 필요 없이 천장에서 눈부신 자연광이 쏟아지는 공공 수영장 할렌바트 시티(Hallenbad City)에서 쾌적하게 수영을 즐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라데플라츠(Paradeplatz) 트램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우산 없이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아름다운 둥근 캐노피가 시민의 머리 위를 안락하게 덮어준다. 내 집과 내 차가 조금 작아져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이유다.
우리는 종종 더 넓은 집, 더 큰 차를 소유한 8,000와트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소진한다. 취리히는 내 손에 쥔 것을 기꺼이 조금 덜어내고 공유하는 2,000와트의 삶이 일상을 얼마나 더 가볍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 줄이기
미국에 환경을 깐깐하게 생각하는 시민이 적은 이유,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내가 살던 뉴욕의 아파트는 분리수거는커녕 쓰레기를 통째로 던져버리는 커다란 구멍(dust chute)이 층마다 뚫려 있었다. 아무리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공간에 살면 분리수거를 계속 실천하기 어렵다.
시민의 환경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타고난 도덕성이나 억지스러운 선의가 아니다. 근검절약하는 부모의 기질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물려받듯, 도시가 지구의 환경을 대하는 수준이 그곳에 사는 시민의 일상과 태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아워월드인데이터(Our World in Data)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약 8,000와트 수준이라고 한다. 시민 한 명이 평생 2,000와트짜리 헤어드라이어 4개를 동시에 강풍으로 켜고 살아가는 셈이다. 이를 취리히처럼 4분의 1로 줄이는 일은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텀블러를 쓰고 재활용 분리수거 라벨을 열심히 뜯어내는 수고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당장 도시 전체의 도로와 건축물을 뒤엎기 어렵다면, 취리히의 칼크브라이테처럼 우리 도시의 특정 건물이나 작은 동네를 ‘2,000와트 구역’으로 지정해 실험해 보면 어떨까? 그곳에 들어가 살아본 시민들이 ‘에너지를 줄였더니 내 삶이 불편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가볍고, 우아하고, 멋지다’라는 감각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우리 도시도 2,000와트 사회를 향해 방향을 틀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그린 워싱을 넘어 ‘그린 인사이드’로
겉보기식 친환경(Greenwashing)은 이제 글로벌 우량 기업들의 엄격한 입주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까다로운 하이엔드 테넌트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대, 이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눈속임이 아닌 구조 자체의 혁신, 즉 ‘그린 인사이드(Green Inside)’가 필요하다.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은, 표면의 마감재만 친환경으로 포장하는 수준을 넘어 시게루 반의 타메디아 빌딩처럼 건물의 근본적인 뼈대를 목구조로 바꾸는 과감한 혁신이다.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당위성을 넘어, 나무 구조로 이뤄진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쾌적함과 심리적 안정감이야말로 입주 기업의 직장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프리미엄이기 때문이다. 건물 전체를 목구조로 올리는 게 현실적으로 무리라면, 1층 로비나 주요 공용 공간의 뼈대만이라도 적용해 볼 만하다.
더 나아가, 취리히의 교훈은 개별 건물의 개발을 넘어 건물과 닿아있는 ‘인프라의 디테일’까지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설계하라는 점이다. 쉬운 예가 있다. 자전거 출퇴근을 유도한답시고 신축 오피스 지하 구석에 거대한 자전거 주차장만 덩그러니 지어놓으면, 코펜하겐 수준의 자전거 도시가 아닌 이상 그 공간은 텅 비기 일쑤다.
진짜 변화는 건물 주변에 자전거 도로를 연결하고, 자전거 주차장과 연결되는 동선에 깨끗하고 편안한 호텔급 샤워 시설을 마련해 줄 때 일어난다. 한여름에 땀을 흘리며 자전거로 출근하는 스위스 출신의 중역을 상상해 보라.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최고급 샤워실에서 쾌적하게 씻고 뽀송뽀송한 정장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는 확신. 이러한 배려가 직장인들을 기꺼이 친환경 출퇴근자로 만든다.
- 1998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ETH Zurich)이 제안한 개념으로, 2050년까지 선진국 시민의 1인당 에너지 사용을 2,000W로 줄이되 삶의 질은 유지하자는 비전. 2008년 취리히 시민투표에서 75% 이상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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