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일본 도야마는 외곽으로 퍼진 도시 기능을 역 중심으로 압축한 콤팩트 시티의 대표 사례로, 기차역을 시민 모두의 거실로 재설계해 도심에 활기를 되살렸습니다.

  • 도야마의 진정한 경쟁력은 트램 노선이 아니라, 1밀리미터의 턱도 없는 승강장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공간 디테일에 있습니다. 어른 기준의 ‘라지 사이즈 시티’를 아이의 보폭에 맞춘 ‘스몰 사이즈 시티’로 전환한 것입니다.

  • 인구 소멸 위기의 중도시는 경전철 같은 하드웨어 도입에 앞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스스로 도시를 누빌 수 있는 섬세한 인프라 설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호텔에 들어와 TV를 켜자, ‘Happy Birthday 니코짱, 2살’이라는 자막과 함께 귀여운 아기의 사진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도야마 지역 TV는 뉴스 말미에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코너가 있다.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기다리다가 니코짱의 생애 첫 티브이 출연에 기뻐하며 박수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구 소멸 시대. 지역의 보물인 아이의 생일을 시민들이 함께 축하해주는 이 따뜻한 풍경은, 내가 도야마에서 발견한 이 도시의 미덕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도야마는 언론에서 수없이 다뤄졌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노인을 위한 도시’라고. 하지만 도심을 발로 걸으며 내가 내린 결론은 달랐다. 도야마는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였다.

도야마 TV에서는 이곳에 사는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인구 소멸 도시에서 아이는 시민들이 함께 보살펴야 할 소중한 ‘보물’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사진: 조성익)

토요일 저녁 7시, 도야마 기차역. 십대들이 속속 실내 광장으로 모여든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들과 머리를 세워 잔뜩 멋을 낸 남자아이들이 서로를 힐끗거리며 매의 눈으로 상대를 재고 있다. 이 젊고 풋풋한 공기로 가득한 역을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본의 여느 지역 도시 기차역의 밤풍경을 떠올려 보자. 대부분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쫓기듯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퇴근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역 일대는 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도야마역의 저녁은 놀랍도록 생기가 넘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 걸까?

‘벤또 도시’의 거실, 도야마역

도시 계획가들에게 도야마역은 성공한 콤팩트 시티(Compact City)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콤팩트 시티, 즉 ‘압축 도시’란 외곽으로 흩어진 주거와 상업, 업무 시설을 한 곳으로 모아 도시의 효율을 높이는 전략을 말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넓은 상 위에 반찬 그릇을 띄엄띄엄 늘어놓는 대신 꼭 필요한 반찬들만 모아 칸칸이 알차게 담아낸 일본 도시락 같은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콤팩트 시티의 심장인 도야마역. 역 앞을 둥글게 감싼 원형 캐노피를 따라 사람과 버스가 모여들고, 도로에는 도심 구석구석을 잇는 트램이 달리고 있다. 멀리 눈 덮인 산맥이 보이지만, 도시는 걷기 좋은 평지다. (사진: 조성익)

이러한 콤팩트 시티가 등장한 배경에는 현대 도시들이 반복해서 앓아 온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 도심의 땅값이 오르면 사람들은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곳에 새로운 주거지와 상권이 형성된다. 마치 세포가 증식하듯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이처럼 도시가 무분별하게 바깥으로 팽창하는 현상을 ‘스프롤(Sprawl)’이라 부른다.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할 때는 이 팽창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구가 줄고 성장이 멈추면 치명적인 두 가지 부작용이 생긴다. 첫째, 텅 빈 외곽 지역까지 상하수도, 전기, 대중교통 등 막대한 인프라를 유지해야 하니 도시의 기본요금이 높아진다. 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지하철이 도심과 외곽을 무의미하게 오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둘째, 밤만 되면 도심이 유령 도시처럼 변한다.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외곽의 집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도심의 식당과 술집은 활기를 잃고 만다.

스프롤 현상으로 늘어난 인프라 비용과 텅 빈 도심. 도야마를 비롯한 인구 감소 도시들이 당면한 이 위기의 해법이 바로 콤팩트 시티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손 닿는 곳에서 일상이 해결되는 이 알찬 ‘벤또 도시’의 한가운데에, 앞에서 말한 기차역이 있다. 도야마역은 기차를 타기 위해 스쳐 가는 정거장이 아니다. 남북을 가로막던 철로를 들어 올려 물리적 단절을 없애고, 그 아래를 평평하게 비워내어 시민 전체를 품는 ‘거대한 거실’을 만들어냈다.

도야마 역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백화점 식품관이 곧바로 이어진다. 보통 지하에 숨어 있기 마련인 식품관을 역 광장과 같은 평면에 나란히 배치했다. 덕분에 퇴근길에 저녁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내릴 일 없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 앞쪽으로는 신선한 해산물 식당들이 불을 밝히며, 술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직장인과 관광객을 붙잡는다.

앞서 보았듯 널찍한 역 광장은 10대들의 아지트다. “주말에 어디 갈까? 일단 역에서 만나.” 도야마의 청소년들에게 역은 모든 약속의 출발점이다. 저녁거리를 사러 식품관에 들른 부모가 광장 한편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자녀를 우연히 마주치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풍경이 펼쳐진다.

1밀리미터의 턱도 없는 도시

어떻게 이렇게 넓은 역에 단차가 하나도 없는지 문득 궁금해져 직접 확인해봤다. 바퀴 달린 여행 트렁크를 끌고 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턱을 찾아보려 했지만, 역 안에서만 그칠 일이 아니었다. 역 주변의 버스 승강장과 횡단보도까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다니는 길 어디에도 1밀리미터의 턱조차 없었다. 도야마의 상징인 트램을 타며 놀라움은 더 커졌다. 계단 없이 이어진 플랫폼에서 자연스럽게 트램에 올랐다. 승강장과 전차 바닥 높이가 정확히 맞아, 어린아이도 부모 손을 잡지 않고 사뿐히 오르내렸다.

한국의 신도시에서 아이가 혼자 마을버스를 타고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상상해 보자. 부모라면 덜컥 사고 걱정부터 앞설 것이다. 가파른 버스 계단을 기어오르듯 타야 하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꼭 쥐어야 하며, 차에서 내려서는 10차선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야 한다. 하지만 도야마의 트램에 연결된 플랫폼과 횡단보도를 아이의 시선으로 살펴보니, 이곳은 혼자서 두부 한 모 사 오는 심부름쯤은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안심 구조였다.

지상을 미끄러지듯 정속 주행하는 트램의 또 다른 묘미는 넓은 창문이다. 캄캄한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과 달리, 창 너머로 길가의 작은 카페와 술집, 광장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창밖 풍경을 보며 ‘아, 다음엔 저기 가봐야지’ 하고 마음속에 점을 찍게 된다. 마치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산책하듯 도시 곳곳을 윈도쇼핑하게 해주는 노면 전차는, 동네 곳곳에 사람들을 부드럽게 실어 나르며 골목의 활기를 채우는 도시의 튼튼한 혈관이었다.

전차에서 내려 승강장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 뒤따르는 어른이 굳이 손을 잡아줄 필요가 없는 이유는 플랫폼과 전차 바닥이 완벽하게 평면을 이루는 ‘초저상’ 설계 때문이다. 아이의 작은 보폭까지 배려한 섬세한 디테일이 일상의 공간을 얼마나 안전하게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사진: 조성익)

전차에서 내려 도시 곳곳을 둘러보는 내내, 발길 닿는 곳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상업 시설로 둘러싸인 도심 광장 ‘그랜드 플라자’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 ‘몰크(Mölkky)’ 대회가 한창이었다. 핀란드 전통 나무 던지기 놀이를 즐기며 남녀노소가 왁자지껄 섞인 풍경이 무척 활기찼다. 건축가 구마 겐고가 도서관과 미술관을 결합해 설계한 ‘글래스 아트 뮤지엄’ 열람실은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로 북적였고, 과거의 운하를 수공간으로 바꾼 ‘칸수이 공원’ 한편에서는 장기 자랑에 나선 청소년 밴드가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도야마 현립 미술관(TAD)이었다. 옥상에는 ‘오노마토페의 옥상(オノマトペの屋上)’이라는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노마토페란 의성어와 의태어를 뜻한다. ‘빙글빙글’ 같은 단어를 테마로 회전 놀이기구를 작품처럼 만들어 둔 식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아이들은 지친 기색 없이 ‘푹신푹신’ 위를 방방 뛰어다녔고, 부모들은 ‘매끈매끈’ 벤치에 앉아 저 멀리 펼쳐진 눈 덮인 산맥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겼다. 엄숙한 미술관 옥상에서는 좀처럼 떠올리기 힘든, 파격적이면서도 따뜻한 공간이었다.

도야마 현립 미술관(TAD) 옥상 정원의 ‘오노마토페의 옥상’. 일본의 저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사토 다쿠(佐藤卓)가 기획한 이 공간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테마로 한 놀이기구들로 채워져 있다. 아이들이 맨발로 신나게 뛰어노는 거대한 흰색 쿠션은 ‘푹신푹신(Fuwafuwa)’을 형상화한 것으로, 어른인 나조차 당장 신발을 벗고 뛰어오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사진: 조성익)

도야마는 인프라를 재설계하고, 도심 이주비와 고령자의 시내 교통비를 지원하는 행정의 영리함이 더해져 콤팩트 시티의 완벽한 교과서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겉모습만 보고 우리 도시에도 당장 경전철을 깔자며 예산부터 확보하려는 지자체장들이 생길까 봐 걱정이 앞선다. 도야마가 진정한 콤팩트 시티가 된 데에는 그저 전차 노선 하나를 신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라지 사이즈에서 스몰 사이즈로

우리가 사는 도시를 둘러보자. 모든 것이 크다. 거대한 건물과 넓은 도로, 심지어 가로수조차 높고 굵은 ‘라지 사이즈’다. 어른에게도 벅찬 이 규모가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른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인프라를 만드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어른의 보호하에 이용할 수 있는 연약한 대상’으로 치부해 왔다.

도야마에 머물며 깨달은 것은, 우리가 당연히 만들어야 할 도시의 세부사항을 놓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도시 시설을 압축하는 콤팩트 시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른 기준의 거대한 ‘라지 사이즈’를 아이의 걸음과 눈높이에 맞춘 ‘스몰 사이즈 시티’로 만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전차역 단차를 계획하는 일에서부터 미술관의 옥상을 기획하는 일까지, 낮은 눈높이에서 공간을 계획하는 섬세한 시선의 전환이야말로 소멸하는 도시에 다시 어린이를 채우는 일의 시작일 것이다.

도야마 전경. 단순히 도시 시설을 압축하는 콤팩트 시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른 기준의 거대한 ‘라지 사이즈’를 아이의 걸음과 눈높이에 맞춘 ‘스몰 사이즈 시티’로 만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진: Wang Tianfang)

아이는 도시가 키운다. 인구 소멸의 위기감에 휩싸였던 도야마시는 도심을 컴팩트 시티로 재편한 이후 20~30대 젊은 가구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야마현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기준 1.35로, 같은 해 일본 전국 평균(1.20)을 상회하고 있다.

인구 소멸의 위기를 겪는 우리 도시의 기차역에 주말마다 청소년들이 모여 재잘거리고, 저녁 TV를 켜면 동네 다섯 살 아이의 생일을 다 함께 축하하는 풍경이 일상으로 펼쳐질 때, 비로소 우리 도시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복합 상업 시설 개발에서 ‘아이’는 이미 가장 중요한 핵심 고객이다. 상업 시설에 아이가 온다는 것은 곧 지갑을 여는 부모가 함께 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형 마트나 복합 쇼핑몰 한구석에 화려한 키즈 카페를 입점시키고, 특정 구역에 아이가 노는 동안 부모가 주변에서 커피를 마시며 소비를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흔한 성공 공식이었다.

건축가 구마 겐고가 도서관과 미술관을 결합해 설계한 도야마의 ‘글래스 아트 뮤지엄(Toyama Kirari)’은 다른 접근법을 제시한다. 학생들의 열람실, 어른들을 위한 잡지 코너, 노인들을 위한 강연장, 관광객을 위한 미술관을 하나의 거대한 공간에 집어넣어 남녀노소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경계 없는 세대 혼합(Generation Mix)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주요 사용자와 피크 타임이 서로 다른 프로그램들을 칸막이 없이 하나의 거대한 공간에 뒤섞을 것. 서로가 서로를 보이게 해서 공간을 24시간 내내 활기가 돌게 할 것. 예를 들어 상업 시설 내부에 경계가 없는 공공 도서관이나 24시간 열람실을 결합하는 식이다. 쇼핑몰의 조명이 꺼진 뒤에도 열람실의 불빛이 청년들을 불러 모은다면, 그 부동산은 한정된 영업시간에 갇힌 상가를 넘어 24시간 가동되는 도시의 거실이 된다.

건축가 구마 겐고가 도서관과 미술관을 결합해 설계한 ‘글래스 아트 뮤지엄’ 내부 전경. 따뜻한 나무 루버가 쏟아져 내리는 탁 트인 공간을 중심으로 여러 층이 입체적으로 얽혀 있다. 우측 하단을 씩씩하게 걷는 빨간 가방의 아이부터, 위층에서 공부하는 시민, 아래층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관광객까지. 굳이 구역을 나누지 않아도 다양한 목적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완벽한 ‘세대 믹스)’의 현장 (사진=조성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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