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베를린에 사는 한국인 건축가는 다시 고른다면 뒤셀도르프에 살겠다고 말합니다. 외국인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이방인이 ‘환영받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 뒤셀도르프는 1960년대부터 일본인 학교, 사찰, 문화 시설을 허가하며 이주자 가족에게 ‘정서적 시민권’을 부여해 왔습니다.

  • 경주 성건동처럼 외국인 커뮤니티가 자생한 한국의 도시도, 포용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면 코스모폴리탄 도시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해외에서 일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느 도시에 살고 싶은지?

얼마 전, 독일의 한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제자 호재 군이 한국에 들어와 인사를 왔다. 결혼하여 가족을 꾸린 그는 베를린에 정착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요즘 핫하다는 베를린살이가 어떻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반(反) 외국인 정서가 심해져서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 흥미로운 말을 덧붙였다.

“독일에서 다시 살 곳을 고르라면 뒤셀도르프를 선택할 것 같아요.”

온갖 인종과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베를린. 이 흥미진진한 도시보다 인구 60만의 중도시 뒤셀도르프에 더 살고 싶다니….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안도감’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관광객이라면 화려한 건축물이나 멋진 클럽이 눈에 띄겠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거주자 입장에서는 내가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 도시가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감각이 더 중요하고, 뒤셀도르프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생겨 좀 더 캐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그런 안도감을 느꼈을까? 그는 베를린이 ‘국제적인(international)’ 도시라면, 뒤셀도르프는 ‘세계시민적인(cosmopolitan)’ 도시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의 인종이 모여사는 베를린과 달리, 뒤셀도르프 시민들에게는 이방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배어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많이 섞여 사는 것과, 그 이방인이 도시의 주인으로 대접받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인구 통계의 문제라면, 후자는 ‘도시의 포용력’이라는 태도의 문제다. 그 미묘한 차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몇 년 전 뒤셀도르프에서 마주친 엉뚱한 간판 하나가 떠올랐다.

도시의 안도감

뒤셀도르프 중앙역 근처 임머만 거리(Immermannstraße)를 걷던 중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재건된 무표정한 독일식 석조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였는데, 1층에 뜬금없는 간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망가 카페(Manga Cafe)’. 엄격, 진지의 나라 독일 한복판에 일본식 만화방이라니. 유리문 너머를 보니 넥타이를 맨 일본인 아저씨, 힙합 모자를 쓴 독일 청년, 그리고 배낭을 멘 한국인 유학생이 함께 앉아서 만화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더 걷다가 만난 베이커리에서는 독일의 딱딱한 호밀빵 대신 폭신한 메론빵을 팔고 있었고, 건너편 서점에서는 사람들이 서서 일본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라멘집 앞에 현지인들이 길게 줄을 섰다. 임머만 거리는 뒤셀도르프의 ‘리틀 도쿄’라 불리는 곳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거리의 형성 과정이다. 1950년대, 전쟁 후 폐허가 된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향해 재건에 몰두했고, 고도성장을 시작한 일본은 독일의 루르(Ruhr) 공업지대에 있는 철강과 기계 기술이 절실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던 그 시기,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의 종합상사들이 루르 공업지대의 관문인 뒤셀도르프로 몰려들었다.

뒤셀도르프의 리틀 도쿄, 임머만 거리(Immermannstraße)의 만화 카페. 독일의 단단한 석조 건물 1층에 도쿄의 골목 문화가 위화감 없이 스며들었다. (사진=조성익)

가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왜 하필 뒤셀도르프였을까? 수도인 베를린이나, 더 큰 도시인 뮌헨이 아니라?

당시 베를린은 동독의 한가운데 고립된 불안한 섬이었기에 비즈니스 본부를 두기엔 위험했다. 그렇다고 철강 공장이 밀집한 에센이나 도르트문트로 들어가기엔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일본의 상사맨들은 굴뚝 연기 속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계약서와 계산기를 두드리는 화이트칼라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루르의 책상(Schreibtisch des Ruhrgebiets)’이라 불리던 뒤셀도르프가 정답이었다.

물론 입지만 좋다고 정착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멀리 독일 땅으로 발령받은 일본 상사맨들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부모 입장에서 관심사는 두 가지, 자녀 교육과 이방인의 외로움이었다.

여기서 뒤셀도르프 시정부의 포용 전략이 효과를 발휘했다. 시는 외국인을 도시 구성원 중 하나로 대우했다. 결정적인 한 수는 학교였다. 뒤셀도르프는 1971년 유럽 최대 규모의 일본인 학교가 들어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이들 학교 문제는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내자, 기러기 아빠 생활을 각오했던 상사맨들이 가족을 모두 데려오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자 자연스럽게 엄마들을 위한 커뮤니티가 생겼고, 주말에 가족이 함께 갈 마트와 식당이 문을 열었다. 임머만 거리의 상권은 그렇게 가족생활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다져졌다.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인 미디어항구(MedienHafen)의 전경.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춤추는 듯한 건축물 ‘노이어 졸호프’와 라인타워가 이색적인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엄격한 도시 그리드에서 벗어난 이 수변 공간은 도시의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한다. (사진=조성익)

문화를 심어야 안도감이 완성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곳은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다. 조금 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백인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대한항공 잡지에 실릴 글의 영어 번역을 하고 있는데, 콩나물 무침에 간장이 들어가는지 사실 확인을 해줄 수 있냐는 거였다. 꽤 유창한 한국말로.

이제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관광만 하러 오는 나라를 넘어섰다. 단순 노동 인력만 유입되던 시기를 넘어, 고학력 지식 계층이 정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고학력 지식계층이 한국에 정착해서 한국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시대가 빠르게 다가 온 것이다. 1960년대 뒤셀도르프에 일본 상사맨들이 도착했을 때처럼 말이다. 이들은 무엇을 원할까? 높은 소득과 깨끗한 숙소면 충분할까?

다시 뒤셀도르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뒤셀도르프가 제공한 것은 ‘정서적 시민권’이었다.

니더카셀(Niederkassel) 지역에 있는 ‘에코 하우스(EKŌ-Haus)‘가 그 증거다. 일본의 기업인이 사재를 털어 일본식 사찰과 정원을 뒤셀도르프에 짓겠다고 했을 때, 시는 이를 흔쾌히 허가했다. 독일의 전형적인 주거 단지 한가운데에 기와지붕을 얹은 사찰이라니? 도시 미관이나 종교적 갈등을 이유로 반대할 법도 했지만, 뒤셀도르프는 이를 도시의 새로운 문화 자산으로 받아들였다. 주말이면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다도를 즐기며 향수병을 달랜다.

뒤셀도르프가 외국인에게 베푼 환대는 이렇다. 양육자에게는 직장을, 아이에게는 학교를, 그리고 가족에게는 마음 쉴 정원을 내어준 것이다. 이 세심한 배려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주자뿐 아니다. 포용적 도시는 원 거주자에게도 좋다. 독일인들은 일본 기업에서 일하고 일본식 정원을 산책하고 동양 예술 전시회에 가서 국제적 문화를 흡수한다.

교토의 어느 사찰이 아니다. 뒤셀도르프 도심 속에 자리한 ‘에코 하우스’의 봄 풍경이다. 도시는 이질적인 이방인의 문화를 배척하는 대신, 동네의 자랑스러운 풍경으로 끌어안았다. (사진=eko-haus.de)

경주 성건동의 잠재력: 천년 고도의 포용성

시선을 우리나라로 돌려보자. 한국에도 뒤셀도르프와 같은 잠재력을 가진 도시가 있을까?

나는 경주를 꼽고 싶다. 우리는 경주를 불국사와 첨성대가 있는 수학여행의 도시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경주는 인구 25만의 중도시이자, 경상북도에서 외국인 거주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인근 산업단지와 농업 기반 덕분에 이미 수많은 외국인이 우리와 섞여 살고 있다.

경주는 뒤셀도르프와 닮은 점이 많다. 고도 제한으로 인해 높은 건물이 없어 도시 전체가 인간적인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걷기 좋은 골목, 황리단길이 있고, 형산강이 도심을 따라 흐른다. 무엇보다 성건동 일대에는 이미 자생적인 외국인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은 다소 낙후된 이미지이지만, 관점을 바꾸면 이곳은 한국의 임머만 거리가 될 원석이다. 아시아 각국의 식당과 마트가 즐비한 이 거리를 외국인 밀집 지역이 아니라, 경주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코스모폴리탄 거리로 재해석한다면 어떨까?

통일신라 시대의 수도 서라벌(경주)은 당시의 국제 도시였다. 전통건축의 툇마루에 앉아 서역의 유리잔으로 술을 마시고, 처용 같은 아라비아 상인이 춤을 추던 융합의 도시였다. 경주가 품고 있는 이 역사 속 포용성이 현대의 이방인들에게도 발휘된다면, 경주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매력적인 ‘코스모폴리탄 중도시’가 될 잠재력이 충분하다.

건축가 호재 군이나 콩나물 무침의 번역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국적에 연연하지 않고 전 세계를 떠돌며 살만한 도시를 찾고 있는 코스모폴리탄이다. 이들이 정착할 만한 대표 코스모폴리탄 도시가 국내에도 생길 때가 됐다.

경주 성건동의 자생적 외국인 거리. 이질적인 언어와 일상이 뒤섞인 이 골목은 천년 고도 경주가 다시금 국제 도시로 나아갈 잠재력을 보여준다. (사진=조성익)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코스모폴리탄이 만드는 자산 가치
만약 경주 같은 전통 도시의 중심에 태국 사원이나 이슬람 정원을 짓도록 허가를 내주자고 한자면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뒤셀도르프의 사례는 도시 개발 시 타민족의 문화 시설이 강력한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가 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준다. 인구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상업 활성화가 필요한 도시로 보면, 이것은 고도의 브랜딩 전략이다.

다실, 사원, 명상 센터 같은 정적인 종교 시설을 도시 앵커로 삼는 것은 도시의 포용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해당 구역을 이국적인 경험을 파는 명소로 만든다. 외국인에게는 안식처를, 내국인에게는 여행 같은 일상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양성을 자산 가치로 환산하는 개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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