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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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은 미쉐린 3스타 3곳을 비롯해 반경 25km 내에 19개의 미쉐린 별이 모여 있는 세계적 미식 도시로, 파인다이닝과 핀초스 바 골목이 공존하는 독특한 생태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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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핵심 경쟁력은 맛집 자체가 아니라, 상업과 주거가 섞인 구도심 구조와 걷기 좋은 골목 디테일에 있습니다. 진정한 미식 도시는 식당 문 안쪽이 아닌 문 밖의 거리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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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을 키워드로 도시를 개발하려는 디벨로퍼는 스타 셰프 유치를 넘어, 고객이 여러 매장을 넘나드는 ‘바 호핑’이 가능하도록 테넌트 믹스와 보행 동선을 설계하는 ‘미식형 장소 개발’ 전략을 고려해야 합니다.
여행의 목적이 된 미식 도시
‘요리가 매우 훌륭해서 특별히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exceptional cuisine, worth a special journey).’
미쉐린 3스타의 이 정의가 요즘처럼 마음에 와닿는 때가 없다. 어딘가로 떠날 이유를 음식에서 찾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전에 가야 할 이유가 ‘성심당 빵집을 가기 위해서’라니. 미식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은 맛집 하나를 넘어 도시 전체를 향하기도 한다. 요리 하나를 맛보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 표를 끊게 만드는 곳. 스페인 북부의 해변 도시,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 바로 그런 곳이다.
산세바스티안을 미식의 성지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구 20만 명도 안 되는 중도시에 스페인 전체에 있는 16개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중 3곳이 자리 잡고 있다.

도심에서 반경 25km 이내로 범위를 넓히면 무려 19개의 미쉐린 별이 모여 있다. 일부러 먹으러 가는 도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점을 찍는 여행에서 면을 훑는 여행으로
산세바스티안은 도노스티아(Donostia)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반도 도시다. 해안선을 따라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 30~40분이면 충분하고,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딱 좋다. 건물들은 유럽의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현대적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세련된 느낌을 준다.
어디서 뭘 먹을까.
이곳을 찾은 이들의 최대 관심사다. 나도 미쉐린 레스토랑 한 곳을 예약해 자리에 앉았다. 수박으로 만든 가스파초, 오징어 라비올리, 저온 조리한 비둘기1, 그리고 로즈마리를 곁들인 구운 복숭아 디저트까지. 프랑스와 가까워서 그런지, 양념이 진하고 개성 넘치는 음식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유명 레스토랑들의 위치 선정 방식이다. 이들은 대부분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차로 20~25분 떨어진 외곽 지역에 홀로 있는 경우가 많다. 상업적으로는 산세바스티안이라는 도시에 기대고 있지만, 관광지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려는 의도다.
멋진 식사였지만, 도심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배를 가득 채운 상태가 살짝 후회됐다. 산세바스티안의 진짜 매력은 이런 고립된 레스토랑이 아니라, 구도심의 좁은 골목에 밀집한 핀초스(Pintxos) 바에 있기 때문이다. 핀초스 바는 한 마디로 ‘스페인 밤의 출발점’이다. 저녁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한입거리 음식, 핀초스를 먹는다.
핀초스를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 식당에 오래 머물지 말 것. 길 따라 걷다가 한 가게에 서서 핀초스 한두 개와 와인 한 잔을 가볍게 즐기고, 또 다른 가게로 자리를 옮기는 바 호핑(bar-hopping)으로 즐겨야 제맛이다.
유명한 핀초스 집의 대기 줄이 길면, 바로 옆 바에 들어가 맥주를 한잔 하며 순서를 기다린다. 하나의 앵커(유명 식당)가 주변의 작은 가게들까지 먹여 살리는 다이닝 생태계가 골목 전체에 형성돼 있다. 이러다 보니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유명 맛집이라는 점만 찍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동네 전체를 훑는 면(面)의 여행이 된다.

미식으로 연결된 사람들
산세바스티안의 미식 생태계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70년대, 프랑스의 누벨퀴진 요리에 자극받은 바스크 지역의 젊은 셰프들은 ‘누에바 코시나 바스카(New Basque Cuisine)’라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프랑스 요리를 흉내 내는 대신, 차가운 칸타브리아해의 해산물과 피레네산맥의 치즈 등 로컬 식재료에 분자 요리 같은 현대적 기법을 결합했다.
셰프들은 비법을 숨기며 경쟁하는 대신, 바스크 요리 전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레시피를 공유하고 연대했다. 이 강력한 사회적 교류 덕분에 미식은 소수의 천재가 이끄는 개인기를 넘어,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기본 이상을 하는 등 평균치가 높아졌다.
2011년에는 이 도시에 바스크 컬리너리 센터(Basque Culinary Center)’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 대학 및 연구소가 세워졌다. 전 세계의 요리 영재들이 모여들며 미식을 단순한 식당이 아닌 학문으로 정립하고 혁신하는 미식 과학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는 미식 생태계의 전체 수준을 높이기 위해 행정과 민간이 합심한 결과다. 젊은 요리사들이 도시에 끊임없이 수혈될 수 있도록 교육 인프라를 탄탄하게 구축한 것이다.
이 도시에 며칠을 있어보니 내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저녁을 정확히 6시에 먹는 습관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때에도 문을 열지 않는 식당이 많아 꽤 고생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녁 시간이 되면 동네 산책을 하게 됐다.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핀초스를 한두 개 먹고, 사람구경도 하고, 옆에 앉은 지역 주민에게 단골 핀초스바도 소개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저녁이 기다려졌다. 이 과정에서 미식이 단순히 독특한 맛을 경험하는 일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맛있는 음식은 우리를 거리로 끌어내고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만든다. 미식은 연결 포인트다. 미식의 도시는 연결의 도시다.
맛집 리스트를 지우고 보행 지도를 그려라
성심당도 대전을 위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도시 공간 관점에서 핀초스 골목을 분석해 보자. 이곳이 우리나라의 먹자골목과 가장 다른 점은 1층 상공간 위로 배후 주거지가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상업과 주거가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기에, 도로 자체를 거대한 상업 공간이자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섞이는 도시의 리빙룸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골목의 디테일이다. 보행을 유도하는 바닥 마감재, 눈부시지 않은 따뜻한 조도, 거슬리지 않는 사이니지(간판)가 어우러져 밤늦게 바 호핑을 해도 안전하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준다. 도시 전체가 적당한 크기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돌아다니기에 지장이 없다는 지형적 장점도 한몫한다. 손님들은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대신 길에 서서 창문을 통해 주문하고 음식을 즐긴다. 진정한 미식 도시는 식당의 문 안쪽이 아니라, 문 밖의 거리에서 완성된다.

한국 지역 도시들이 미식을 마케팅할 때 흔히 하는 실수는 ‘맛집 리스트’만 홍보할 뿐, 그 맛집들을 연결하는 ‘길의 퀄리티’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얻은 교훈은 식당 내부의 인테리어가 아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마주하는 가로의 쾌적함을 설계해야 한다.
미식이 도시를 살리는 키워드가 된 요즘, 우리 도시들이 한국의 산세바스티안이 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차선을 줄이고 보행로를 넓히며, 1층 상가의 시각적 투명성을 높이는 친근한 입면 계획이다. 쉽게 말해 백화점 식품관이 야외로 나온 것과 같은 ‘식품관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럼 한국의 산세바스티안이 될 만한 미식 도시는 어디일까? 통영은 바다를 품은 항구와 촘촘한 구도심 골목을 가졌다는 점에서 산세바스티안과 비견된다. 술을 시키면 해산물 안주가 코스처럼 깔리는 통영 특유의 ‘다찌’ 문화도 있다.
이를 도시 공간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닫혀 있는 강구안 이면도로 다찌집들의 1층 파사드를 폴딩도어 등 개방형으로 바꾸고 저녁 시간만이라도 자동차 대신 사람만 다닐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길거리에 서서 해산물과 술을 즐기고 옆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한국형 핀초스 골목’이 탄생할 것이다.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단일 앵커를 넘어 보행 생태계를 기획하라
산세바스티안은 미식판 ‘구겐하임 미술관 효과(Guggenheim Effect)’라 부를 만하다. 스페인 북부의 쇠락한 공업도시 빌바오(Bilbao)가 프랑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하드웨어(건축물)로 도시를 재생했다면, 산세바스티안은 파인다이닝으로 전 세계의 자본과 인재를 끌어모았다. 미술관 하나 짓는 것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레스토랑이 있는 것이 도시의 브랜드 가치와 경제에 얼마나 강력한 집객 효과를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부동산 개발 트렌드도 이를 뒷받침한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회사 CBRE의 2026년 1분기 맨해튼 리테일 보고서에 따르면, 식음료(F&B) 섹터는 29건의 계약을 성사시키며 분기 중 가장 많은 거래를 기록한 테넌트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일식 오마카세 소라(SORA) 고급 스테이크하우스 델모니코스(Delmonico’s), 프렌치-베트남 파인다이닝 르 콜로니얼(Le Colonial) 등 셰프 주도형(chef-driven) 파인다이닝 컨셉이 주요 개발 사업의 앵커 테넌트로 연이어 진입하고 있다.
다만 도시적 관점에서 볼 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는 장점과 한계가 함께 있다. 미쉐린 별을 받으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파인다이닝은 고객이 레스토랑 내부에만 3시간 이상 머무르다 귀가하기 때문에 주변 지역이나 다른 상점으로 넘어가는 낙수효과가 극히 적다. 화려한 파인다이닝 하나를 유치해 고객을 3시간 동안 한 공간에만 붙잡아 두면, 수익 확장성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산세바스티안이 공간 디벨로퍼들에게 던지는 교훈은 스타 셰프 섭외, 그다음 단계에 있다. 스타 셰프 섭외는 시작일 뿐, 그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유명 식당의 대기 줄이 옆 가게의 맥주 매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고객이 여러 매장을 넘나들 수 있는 테넌트 믹스와 매력적인 보행 동선을 설계해야 한다. 상권의 가치는 단일 매장의 체류 시간이 아니라, 매장과 매장 사이를 오가는 이동 시간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미식형 장소 개발’이다. 단일 스타 셰프 유치가 아닌, 도시 전체를 하나의 바 호핑 생태계로 구현하는 전략. 그 성패는 단위 점포의 인테리어가 아니라, 매장 밖의 길을 얼마나 쾌적하게 만들고 1층의 시각적 개방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디벨로퍼의 경쟁력은 어떤 셰프를 유치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있다.
- 저온조리(수비드 등)를 활용한 비둘기 요리는 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고급 요리다. 지방이 적고 육향이 강하며 닭고기보다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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