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일본 무사시노시는 무사시사카이역 바로 앞,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좋은 요지에 공공 복합시설 ‘무사시노 플레이스’를 세워 시민 누구나 머무는 마을의 거실로 만들었습니다.

  •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1층 명당을 신문·잡지 코너와 카페에 내주고, 공간을 나누면서도 시야는 이어지는 ‘동굴벽’을 도입해 책을 읽지 않는 사람까지 품는 도서관이 되었습니다.

  • 사람이 모이던 자리에 도서관을 두면 체류 시간이 늘어나고 동네의 일상이 달라집니다. 비어 가는 대형 상업시설을 도서관으로 전환하는 해외 사례도 이런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어르신 한 분이 ‘창문 멍’을 하고 있었다. 특별 제작한 1인용 의자에 앉아 둥근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창밖에는 기차역. 퇴근길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일본 무사시노시의 한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책을 읽거나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머무는 일’에 최적화된 의자들이 전망 좋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일까?

무사시노 플레이스의 창가 자리. 책을 읽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이 의자들은, 도서관이 책 읽는 곳을 넘어 마을의 거실이 되기 위한 장치다. (사진: 조성익)

역 앞 금싸라기 땅에 도서관을 세운 도시

도쿄 중심가에서 기차로 20분. 무사시사카이 역에 내렸더니 잘 정돈된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형 마트와 상가가 둘러싼 마을의 중심지다. 그런데 간판으로 빼곡한 건물들 사이로 유난히 눈에 띄는 백색 건물 하나가 보인다. 마치 눈이 여러 개 달린 외계인처럼 길고 둥근 창이 여러 개 나있는 공공도서관 ‘무사시노 플레이스(Musashino Place)’다. 

사실, 창문의 독특한 형태를 빼면 역 주변의 여느 사무실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외관이다. 하지만 이 건물이 특별한 이유는 입지다. 기차역에서 내려 3분만 걸으면 닿는, 역세권 한복판을 공공도서관이 차지하고 있다. 유동 인구가 몰리는 역세권은 도시의 금싸라기 땅. 응당 백화점이나 대형 복합 쇼핑몰, 주상복합 아파트가 차지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무사시노시는 그 자리를 시민 누구나 공평하게 머물 수 있는 공공도서관에 내어주었다.

창문 하나에 힘을 줘 독특한 외관을 만들었다. 타원형 창문의 모티브는 실내에도 이어져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사시노 플레이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사진: 조성익)

무사시노 플레이스의 내부를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도시 이론을 하나 짚고 가자. 무사시사카이 역 일대의 재정비에는 TOD라는 아이디어가 있다. 대중교통 지향형 개발(Transit-Oriented Development), 말 그대로 역을 중심으로 마을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무사시사카이 역은 일본의 많은 역이 그렇듯, 한때 지상으로 열차가 달리던 지상역이었다. 하지만 지상역은 도시를 양분해 단절을 일으키고, 건널목에서 극심한 교통체증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간단한 처방은 선로를 고가로 올려 통행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고가 하부와 기존 선로 부지에 넓은 유휴 공간이 생긴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무사시사카이 역에서도 2009년 무렵 중앙선 고가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마을이 하나로 이어졌다. 고가 하부에는 역과 연결된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남북이 이어지는 이 시점은 마을의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일반적인 TOD 개발이라면 개발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역 앞 요지에 백화점·쇼핑몰·대형마트 같은 상업시설을 밀집시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무사시노시는 역 남쪽 바로 앞에 남아 있던 옛 농림수산성 식량창고 부지를, 상업시설 대신 도서관과 공원으로 채웠다. 상업성보다 시민의 일상 지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무사시사카이 역에 내리면 상가와 오피스 사이로 무사시노 플레이스 도서관의 외관이 보인다. 도시 중심역에서 불과 3분 안에 책과 배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사진: 조성익)

퇴근길에 들르는 마을의 거실

무사시노시에 사는 직장인이라고 상상해 보자. 저녁 6시, 도쿄 신주쿠의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채 전철에 몸을 싣는다.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하나뿐이다.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밥 먹고, 소파에 드러눕고 싶다.’ 

역에 내리자마자 저녁거리를 파는 작은 상점이 눈에 들어온다. 역 근처에는 대형 쇼핑몰 대신 반찬을 사거나 테이크아웃할 만한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어 기분 전환 겸 구경하기에 좋다. 천천히 둘러보며 오늘은 뭘 먹을까 궁리한다. 이제 진짜 집으로 가자. 아, 그런데 회사에서 회의 중 이야기가 나왔던 인공지능 관련 신간 서적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 광장 앞의 무사시노 플레이스 도서관에 들러 볼까. (이후의 상상은 더 이어지지만, 요지를 줄이자면 이렇다.) 지친 직장인은 결국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뒤, 우연히 마주친 동네 친구와 1층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도시의 물리적 구조는 우리의 일상을 좌우한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맥도널드부터 눈에 들어오는 동네에 살면, 저녁을 햄버거로 때울 확률이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그렇다면 퇴근길, 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 한가운데에 도서관이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굳이 마음을 먹고 도서관을 찾아가지 않아도, 무심코 신간 코너를 훑고 도서관 카페에서 사람들과 스치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핫플레이스가 된 도서관이 화제다. 서울 삼성동 스타필드의 별마당도서관은 외국인 관광객의 인기 장소가 되었고, 종로 인왕산 자락의 청운문학도서관은 한옥의 고즈넉한 멋을 살렸다. 고창 황윤석도서관은 웅장한 목구조가 만드는 공간감 덕분에 주말 하루 1,500명 안팎이 찾는다.

하지만 도서관을 팍팍한 도시 생활 속 ‘마을의 조용한 거실’로 사용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이런 화려한 핫플레이스형 도서관은 오히려 피하고 싶은 공간이 되기 쉽다.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과시적인 볼거리 대신 오래 머무는 편안함에 집중해, 묵묵히 도시인의 거실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이 라이브러리(library)가 아니라 장소를 뜻하는 플레이스(place)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책을 빌리는 곳을 넘어 평생학습과 시민활동, 청소년활동까지 품은 동네의 공용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내로 들어가 보자.

무사시노 플레이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1층이다. 일반적으로 대출 데스크나 신간 베스트셀러로 채워져 있을 이곳은, 대신 노년층이 오래 머무는 잡지·신문 코너가 중심을 이룬다. 글의 서두에서 보았던 ‘창문 멍’을 하기에 좋은 1인용 의자들도 놓여 있다.

책에 대한 수요가 적은 노년층을 배려해 1층 한가운데는 신문과 잡지코너로 꾸몄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광장 같은 도서관이다. (사진: 조성익)

최근 20대 사이에서는 ‘텍스트 힙(Text Hip)’ 문화로 독서가 유행하지만, 오히려 60대 이상에서는 독서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소득에 따른 독서 양극화도 심각하다.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독서 소외 계층을 역 앞 명당으로 끌어들여, 독서가 아니라 머무름부터 가능하게 만든다.

폭넓은 세대를 품기 위해, 이 도서관은 독특한 건축 장치를 도입했다. 모름지기 도서관이라면 잡지·어린이·신간 등 코너별로 분위기를 분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방으로 쪼개면 공간의 개방감이 사라진다. ‘나누되, 열린 느낌은 유지해야 한다’는 모순을 디자인으로 풀어낸 해법이 바로 ‘동굴 벽’이다. 공간이 벽으로 구획된 듯하면서도 동굴처럼 둥글게 이어져, 하나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시야와 동선이 흘러가도록 설계했다.

둥근 구멍이 뚫린 동굴벽은 도서관의 공간을 나누면서도 이어준다. 아늑한 청소년 도서코너에서 책을 읽다가도 동굴벽 너머의 카페 공간으로 시선이 이어지도록 했다. (사진: 조성익)

놀기 좋은 동네, 살기 좋은 동네

무사시노 시에는 다이토켄타쿠 조사에서 8년 연속 ‘살고 싶은 마을’ 1위에 오른 기치조지(吉祥寺)가 있다. 기차역부터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이 이어져 거리가 늘 활기찬 마을이다. 주민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기치조지와 달리, 무사시노 플레이스가 있는 무사시사카이 역 주변은 한적하고 평온하다. 같은 시(市) 안에 있지만 무사시사카이 역 일대를 기치조지처럼 번잡한 상업 지구로 개발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기치조지는 소비와 상업의 중심으로, 무사시사카이 역은 정주와 일상의 중심으로 기능을 나누어 맡고 있는 셈이다.

누가 내게 두 마을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조금 고민이 될 것 같다. 재미있기는 확실히 기치조지가 좋겠지만… 결국 조용한 일상을 꾸리며 살 곳으로는 무사시사카이를 택할 것 같다. 이유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역 앞에 좋은 도서관이 있어서”라고 답하겠다.

혹시 도서관에 들를 계획이라면, 저녁에 1층 카페 페르마타에 앉아 프리미엄 무사시노 맥주 한 잔을 마셔보라 권하고 싶다. 도서관은 밤 10시까지 문을 열고 카페는 저녁 8시 반까지 운영하니, 퇴근길에 여유 있게 머물러보자.무사시노 플레이스는 시민의 발길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아이디어를 짜낸다. 미래의 도서관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사람을 모으고 연결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1층 카페 페르마타는 아침, 점심, 저녁 메뉴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저녁에는 와인도 한 잔 할 수 있다. 도시 광장으로 도서관의 임무를 재설정하자 공간의 역할이 명확해졌다. 남녀노소,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라. (사진: 조성익)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빈 대형마트, 도서관으로 다시 채우다]
도서관이 사람을 끌어모으고 체류 시간을 늘리는 앵커(anchor)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은 부동산 개발 분야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여기, 조금 독특한 사례가 있다. 미국 포틀랜드 동부, 30년 전 지어졌지만 영업이 중단된 대형 식료품점. 이 거대한 공간을 개조해 도서관 운영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도서관 관련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공간이자,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최근 국내 홈플러스 점포들이 문을 닫으면서, 도심지 초거대 공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된 이상, 이런 고민은 앞으로 홈플러스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대형 상업공간을 도서관으로 전환할 때의 장점은 분명하다. 첫째는 입지다. 본래 사람들이 모이던 자리다. 둘째는 면적이다. 도서관 역시 높은 층고와 넓은 바닥면적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환기·조명 설비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고, 기존 매대를 재활용하면 서가 설치도 수월하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특히 지방 도시의 중심부를 중심으로, 비어 있는 대형 상업시설을 생활밀착형 도서관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포틀랜드의 빈 상업시설이 도서관 시설로 탈바꿈했다. 공간계획의 관점에서 볼 때 도서관과 대형 마트는 공통점이 많다. 시야가 트인 공간에 진열된 상품 혹은 책. 물건 계산대와 대출 반납대의 위치, 휴식공간이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것도 비슷하다. (사진: Dez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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