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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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상프로방스는 도시 곳곳에 수십 개의 분수가 놓인 ‘쿨링 인프라’의 도시로, 물방울이 열기를 흡수하며 증발해 거리에 서늘한 미기후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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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수들은 로마 시대 온천에서 출발해 17세기 귀족들의 과시용 공공 예술로 발전했고, 400년이 지난 지금 폭염 속에서도 시민과 여행객을 거리로 불러내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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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뉴노멀이 된 시대, 쿨링 인프라는 누구나 돈을 내지 않고 시원함을 누리는 ‘기후 복지’이자 동네의 ‘일상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습니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여러 번 되뇌게 되는 멋진 이름의 도시다. 강하게 “엑.상.”, 부드럽게 “프로방~스”. 그런데 뜻을 찾아보니 의외로 ‘프로방스 지방의 물’이라는 다소 평범한 의미였다. 도시 이름이 ‘경상도의 물’ 쯤 되는 셈이다.
깊고 푸른 남프랑스의 하늘. 태양이 작열하는 늦여름. 엑상프로방스에는 수십 개의 분수에서 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곳곳에 식수대가 있어 편의점에서 생수를 살 필요도 없다. 골목골목에 더위를 식혀주는 기반 시설이 깔려있는 ‘쿨링 인프라(cooling infrastructure)’의 도시다.
회장님 표정의 돌고래, 이끼 덮인 호박
이 도시의 분수는 더위를 식혀줄 뿐 아니라 눈도 즐겁게 한다. 하나하나가 개성 있는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분수가 무엇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인기투표를 한다면 ‘네 마리 돌고래 분수(Fontaine des Quatre-Dauphins)’가 강력한 후보다. 돌고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귀엽기보다는 어딘가 노회한 회장님 표정의 돌고래여서 웃음이 나온다.

내가 뽑은 최고의 분수는 미라보 거리를 걷다 발견한 모시 분수(Fontaine Moussue)다. 커다란 호박 모양의 돌에 두꺼운 초록 이끼가 덮여있고, 그 위로 소박하게 몇 줄기 물이 흐른다. 그 덕에 이 무덥고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도 이끼가 습도를 유지하며 잘 자란다. 자연과 인간이 힘을 합쳐 만든 조각이다.

로마인의 온천에서 귀족의 과시품으로
엑상프로방스가 ‘분수의 도시’가 된 이유는 이 도시의 발 밑에 천연 온천과 지하수가 풍부하게 흐르기 때문이다. 기원전 123년, 로마인은 이 땅에서 솟아나는 온천을 보고 도시를 세웠다. 도시의 옛 이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는 ‘섹스티우스의 물’이라는 뜻이다. 이후에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식수와 생활용수로 쓰였다. 양떼를 몰고 이동하던 목동들이 가축에게 물을 먹이던 장소이기도 했으니, 목축업을 위한 산업 용수이기도 했다.
그러다 프랑스가 최고의 부를 누리던 17세기, 부유한 귀족들이 화려한 저택 마을을 조성하면서 분수의 역할도 바뀌었다. 단순한 식수대를 넘어 귀족 동네의 재력을 드러내는 과시용 공공 예술이 된 것이다. 시 정부와 귀족들은 저명한 조각가를 고용해 광장마다 멋진 장식의 분수를 세웠다. 앞서 만난 네 마리 돌고래 분수 역시 바로크 특유의 곡선미로 귀족 동네의 품격을 높여준 명작이다.
그 덕에 400년이 지난 오늘, 땀을 뻘뻘 흘리며 도시를 산책하던 내가 분수 앞에서 한숨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근처 가게에서 엑상프로방스의 명물인 달콤한 칼리송(Calisson)1을 사서,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는다. 시원한 것은 소리만이 아니다. 물방울이 주변의 열기를 흡수하며 증발하는 덕분에 공기 자체도 한결 서늘하다. 작은 분수 하나가 지표면에서 미기후(microclimate)2를 조성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셈이다.
프랑스 남부의 여름 날씨도 우리나라만큼이나 혹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엑상프로방스의 주민과 여행객들은 산책을 포기하지 않는다.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만 콕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천연 에어컨인 분수 덕분에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 덕에 과자 가게와 여름 칵테일을 파는 바에 손님이 북적인다.
겨울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개성 넘치는 분수는 가로에 활기를 불어넣는 공공 예술품이 된다. “우리 이끼 분수 앞에서 만나서 식당까지 함께 걷자.” 엑상프로방스의 연인들은 이런 낭만적인 저녁 약속을 할 것 같다.
이번 여름에도 무더위에 외출을 자제하라는 긴급문자가 자주 왔다. 그렇다고 도시가 멈출 수는 없다. 한국에 처음 온 관광객에게 호텔에만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는 반려인이 산책을 거를 수도 없다. 디저트 가게도 손님이 와야 장사가 된다. 폭염이 전 세계의 뉴노멀이 된 시대, 이제는 지혜를 짜내 ‘도시 식히기’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

겨울에도 꺼지지 않는 시카고의 분수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쿨링 인프라는 겨울이 되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특히 겨울이 길고 혹독한 우리나라에서는 운영이 멈춘 기간 동안 을씨년스러운 흉물로 방치되곤 한다.
좋은 대책이 있다. 겨울이 길고 추운 미국 시카고로 가보자. 밀레니엄 파크의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는 대형 LED 영상 스크린으로 만들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화면에 거대하게 등장해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오므리는 순간 입 위치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앗! 하하하. 사람들은 그 장면에 놀라 웃으며, 입에서 나온 물 웅덩이에서 첨벙첨벙 더위를 식힌다.
예술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디자인한 공공미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해 인종, 나이, 성별을 고려해 실제 시카고 시민 약 1,000명의 얼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겨울에는 동파 방지를 위해 분수의 물 공급을 중단한다. 하지만 LED 비디오 스크린은 겨울에도 꺼지지 않고 365일 내내 작동한다. 여름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쿨링 인프라로, 겨울에는 하얀 눈밭 위에서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는 조명 장치로 기능한다.

거울 하나로 두 배가 된 홍제폭포
예술로 승화된 쿨링 인프라, 우리나라에도 있을까? 광화문 광장의 바닥분수, 여의도의 물빛광장… 후보는 많지만, 나는 서울 홍제폭포에 한 표를 보낸다.
홍제천을 따라 산책할 때마다 늘 쉬어 가는 곳이 서대문 홍제폭포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폭포가 있었나? 그런 착각을 할 만큼 자연스러운 조경으로 꾸민 인공폭포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흉내 낸 시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폭포에 높은 예술 점수를 주는 이유는 폭포 앞에 거대한 거울을 두어, 좁은 홍제천의 공간이 확장돼 보이게 만든 점이다. 실제 폭포 하나, 거울에 비친 폭포 하나. 이 두 개의 폭포 사이에서 셀카를 찍는 사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람, 거울 속 자신과 풍경을 보며 씽긋 웃고 지나가는 사람. 고가도로 밑 어두운 산책로에 놓인 이 작은 반사면 하나가 공간을 넓혀주고 시민들을 미소 짓게 한다.

일상의 랜드마크가 필요하다
우리 도시에 필요한 쿨링 인프라는 분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횡단보도 앞 그늘막이나 안개 분사 장치가 달린 버스 정류장도 쿨링 인프라다. 폭염 속에서도 도시가 멈추지 않게 하고, 돈을 내고 어딘가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시원함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돕는 장치. 모두를 위한 ‘기후 복지’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배운 것은, 이런 인프라가 기능에 그치지 않고 도시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남산타워가 누구나 떠올리는 서울의 랜드마크라면, 동네를 산책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랜드마크’가 필요하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분수 앞 벤치, 내 반려견이 물을 마실 수 있는 아름다운 음수대 같은 것. 나 역시 엑상프로방스, 그리고 남프랑스의 여름을 떠올리면 칼리송을 먹던 이끼 분수의 시간이 가장 먼저 생각나니까.
[도시 개발자를 위한 한 줄: 여름 한철 수공간을 사계절 자산으로]
최근 옥상 그늘에 앉아 족욕을 하는 어느 사진을 보고 “도쿄에 가야겠다”는 지인들이 있다.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해 2026년 3월 개관한 도쿄의 복합문화공간 ‘몬 다카나와(MoN Takanawa)’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나선형 목재 구조가 특징이다. 옥상에는 ‘풋스파(족욕 테라스)’가 마련돼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발을 담글 수 있다.
한국처럼 겨울이 길고 혹독한 곳에서 여름 한철만 쓰는 수공간은 유지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건조한 지중해 기후와 달리 습도가 높은 여름 탓에, 기화열로 미기후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물’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일은 비용 대비 효율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을 끌어들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물의 마력을 마냥 포기할 수는 없다.
사계절용 ‘족욕천(足浴川)’은 어떨까? 온수와 냉수를 유연하게 활용한다면 사시사철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공간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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