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세계적인 건축 듀오 헤르조그 앤 드뫼롱이 설계한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가 2028년, 서울 서초구 옛 정보사 부지에 들어섭니다.

  • 헤르조그 앤 드뫼롱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스위스 건축사로, 중국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과 독일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 등을 설계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 헤르조그 앤 드뫼롱 바젤 스튜디오에서 실무를 경험한 심희준 건축가가 이들의 독특한 작업 방식과 철학, 그리고 태도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스위스 바젤. 라인강이 천천히 흐르고, 골목길을 따라 자전거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차분한 거리에는 세계 건축의 흐름을 바꾼 건축 실험실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건축사사무소 헤르조그 앤 드뫼롱(Herzog & de Meuron, 이하 H&dM)의 스튜디오다. 나는 20대 후반, 이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그곳에서의 경험은 건축을 향한 나의 시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H&dM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2005)과 엘프 필하모니(Elbphilharmonie, 2017) 같은 프로젝트로 세계 건축계의 중심에 올랐다. 기존의 산업시설을 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테이트 모던은 단순한 재생이 아닌, 시간의 층위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도시 흐름을 이끌어낸 전환의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함부르크 항구 위에 떠 있는 듯한 엘프 필하모니는 음악과 풍경, 기술이 삼중주를 이루는 구조물로, 건축적 상상력과 기술적 도전의 집합체였다. 이 두 작업은 H&dM의 실험적 감수성과 구조적 대담함, 그리고 장소에 대한 섬세한 해석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H&dM이 설계한 함부르크 엘프 필하모니 ⓒThies Ratzke (사진출처=elbphilharmonie)

최근 한국에서는 H&dM이 서울시의 공공건축 프로젝트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 국제 설계공모에 당선되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테이트 모던과 엘프 필하모니 이후, 도시 맥락과 장소성에 기반한 실험을 꾸준히 이어온 이들의 작업은 이제 서울이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또 어떤 감각적 해석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H&dM이 어떤 건축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을 위해 내가 경험한 H&dM의 태도와 철학을 공유하려고 한다.

드라이슈피츠, 건축가를 닮은 동네

H&dM의 본사인 바젤 스튜디오는 스위스 바젤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차분한 주택가와 창고가 뒤섞인 드라이슈피츠(Dreispitz)라는 구역에 있다. 나는 사무실과 같은 길목, 라인강 가까이에 집을 구해 아침이면 강을 따라 출근했다. 여느 스위스 마을처럼 깨끗하고 정돈된 동네는, 너무 과묵하지도 않지만 필요 이상의 설명도 하지 않는 듯한 도시였다. 어쩌면 그런 점이 H&dM의 건축 태도와 닮아 있는 것 같다.

공동대표인 자크 헤르조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우리는 도시의 분위기, 작은 거리, 오래된 창고에서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죠.” 라인강을 따라 달리며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하나의 재료가 되고, 스케치가 되고, 건축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나는 이곳에서 실감했다.

라인강 인근, 차분한 분위기의 주택가와 창고가 뒤섞인 동네 드라이슈피츠에 자리잡은 H&dM 바젤 스튜디오 (사진제공=심희준)

끝없이 이어지는 모형 제작

이 사무실의 가장 독특한 풍경은 끝없는 모형 제작이다. 프로젝트 하나당 수십, 수백 개의 모델이 제작되고, 다양한 크기와 재료, 방법으로 실험이 이어진다. 내가 경험한 어느 프로젝트는 하나의 회의실과 창고 두세 개를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모형이 만들어졌고, 그중 일부는 1:1 스케일의 ‘목업(Mock-up)’으로 구현되었다. H&dM은 건축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드 뫼롱은 테이트모던 관장인 크리스 더컨(Chris Dercon)과의 대담에서 “우리는 설계 도면보다 물리적 실험에서 더 많은 진실을 찾습니다. 실제로 만져보고 느끼는 재료에서 건축의 본질이 드러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철학은 H&dM의 실무 전반에 녹아 있으며, 콘크리트 타설 실험, 재료 마모 테스트, 질감 연구 등은 단순한 예산 검토를 넘어 건축을 구성하는 감각적 언어의 탐색이다.

설계 도면보다 물리적 건축 모형을 만지면서 더 심도있는 실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진은 모형을 두고 토론하는 모습. (사진제공=심희준)

아침 10:30, 스위스 간식타임

매일 아침 10시 30분 즈음, 사무실 전체가 리듬을 잠시 늦추고, 서로의 작업 공간을 벗어나 짧은 교류의 시간을 갖는다. 바로 스위스식 간식 타임인 “츠뉘니스(Znünis)” 때문이다. 커피와 함께 제공되는 빵이나 과일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중요한 소통의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다른 팀에서 어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지, 누구는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다.

H&dM의 여러 건물은 각기 대륙이나 프로젝트 특성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이 사무실은 40개국 이상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정예 건축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영어와 독일어가 가능해 스위스 내 프로젝트(Wasserstadt Solothurn 등)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건물 사이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문화는 이곳만의 특별한 동력이라 느꼈다.

무한 반복과 결정: 끊임없는 수정의 미학

자크 헤르조그(Jacques Herzog)는 클래시콘(ClassiCo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완벽한 건축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시 만들고, 또 실험합니다.” H&dM의 설계 프로세스는 철저하게 비선형적이다. 도면은 수시로 바뀌고, 모형도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된다. 만족할 때까지, 납득이 갈 때까지, 그리고 감각적으로 올바르다고 느껴질 때까지 바뀐다.

악텔리온 비즈니스 센터(Actelion Business Center, 2010) 프로젝트에서 나는 이 과정을 직접 경험했다. 간결하지만 복잡한 이 건물의 외형은 수많은 모델 실험과 텍스처 테스트, 그리고 물리적 감각의 총합이었다. H&dM의 입구 문이 대영박물관 외장을 위한 목업 테스트 중 만들어진 타공된 코퍼로 된 점도 이러한 철학의 상징이다.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얻은 재료 경험은 또 다른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다.

서로 겹쳐진 들보 형태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악텔리온 비즈니스 센터 건물 모형. 이러한 개방적인 구조는 직원들이 일하고,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테라스와 안뜰을 제공하기에 유리하다. (사진제공=심희준)

“건축은 시각이 아닌 정서적 경험이다”

H&dM은 최근 ‘감정과 공간(Space and Emotion)’에 대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 인상이나 기능적 효율을 넘어서, 건축이 사람의 감정과 어떻게 교감하는가를 묻는 태도다. 수석 파트너인 크리스티네 빈스방거(Christine Binswanger)는 PIN–UP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빛, 온도, 재료의 미묘한 차이들이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바꾸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건축이 단지 시각적 상징이 아닌 정서적 경험이라는 관점은 H&dM이 이끄는 다음 세대 건축의 언어로 읽힐 수 있다.

친환경을 넘어 지속가능성과 윤리의 추구

H&dM은 최근 스위스의 은행 롬바르 오디에(Lombard Odier) 본사를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지속가능성과 재료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자크 헤르조그는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으며, 일상적인 이동은 자전거로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 자체가 그들의 건축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재활용 가능 자재, 지역 조달 자재, 그리고 장기적인 에너지 소비를 고려한 설계는 단지 환경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수준을 넘어서, 건축이 미래를 예측하고 책임질 수 있는 영역임을 시사한다. 이들은 단순한 ‘친환경’이라는 수사보다 훨씬 더 정교한 질문을 던진다: “지속가능성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일 수도 있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속 가능성이다.”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대표의 시너지

자크 헤르조그는 바젤에서 자주 조깅을 한다. 그는 달리며 도시의 표면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해석하며 아이디어를 포착한다. 또다른 공동대표인 드 뫼롱은 비교적 조용하고 내면적인 성격으로, 재료의 감성과 감각에 집중한다. 두 사람의 상반된 성격이 어떻게 하나의 브랜드를 구성하고 세계적인 건축을 만들어내는지, 그것은 이 사무실의 최대 매력 중 하나다. 바젤이라는 도시가 지닌 높은 일상성은 그들의 관찰력과 감수성을 길러낸 토양이 되었고, 이는 H&dM의 작업 방식과 건축적 태도를 뿌리 깊게 지탱하고 있다. H&dM의 건축은 그렇게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축적한 결과물로서 건축적 유산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H&dM이 말하는 건축의 태도

인터뷰들 속에서 그들은 일관되게 강조한다. “우리는 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태도를 갖고 있다.” 이 말은 단지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그들은 프로젝트의 문맥과 장소, 사용자의 요구, 그리고 사회적 조건을 읽고 그에 따른 새로운 답을 도출해내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H&dM의 작업은 서로 유사하지 않지만, 모두 명확한 사유와 실험의 흔적을 공유한다.

건축가가 디자이너가 아닌, 실험가 혹은 편집자에 가까워야 한다는 주장. 그러한 주장은 특히 나처럼 한동안 이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뼈에 새겨진 철학이 된다. 건축의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양한 층위의 감각과 논리, 그리고 시선이 중첩된 결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만날 H&dM의 새 작품을 기대하며

이 글을 통해 잠시나마 내가 바젤에서 체험한 건축 실험실의 분위기, 라인강을 따라 이어졌던 출근길의 감각, 그리고 손끝으로 이어진 재료의 기억은 한국의 건축가들에게도 충분히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디지털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모형, 환경 등은 공간을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 중 하나다. 그리고 설계의 끝은 시공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의 완성이며,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H&dM은 그러한 감각적 완성을 향한 아주 집요하고도 끈기 있는 탐구자들이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한 명의 건축가로서 내게 ‘태도’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 시기였다. 이제 그 태도를, 내가 서 있는 이곳, 한국에서 실험하고 확장해나가고 있다.

서초구 옛 정보사 부지에 들어설 국내 최초의 미술관형 수장고. 이 수장고의 설계공모에서 H&dM이 최종 당선됐다. ©헤르조그 앤 드뫼롱 (사진출처=서울시)
수장고 단면. 1층에서 상부로 이동하면서 보존조건에 따라 정교하게 분류한 수장품을 방문자가 로비에서부터 단계적으로 발견해가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헤르조그 앤 드뫼롱 (사진출처=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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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025년 6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시장 환경 등에 따라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