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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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은 서울 용산구와 비슷한 면적에 4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분산 배치되어, 10분마다 문화 시설을 마주치는 높은 ‘박물관 밀도’가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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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화 밀도는 창의 인재가 원하는 직주락문(일하고, 살고, 놀고, 문화를 즐기는) 근접성을 충족시켜, 로슈·노바티스 등 700여 개 첨단 바이오 기업이 바젤에 본사를 둔 핵심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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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산업을 유치하려는 중도시는 산업 단지 조성만이 아니라 보행 동선을 따라 중소형 문화 시설을 촘촘히 배치하는 ‘문화 밀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서울 서촌에서 건축 설계 사무실을 운영한 적이 있다. 서촌은 대림 미술관, 류가헌, 팩토리 등 수많은 갤러리가 골목 곳곳에 자리한 동네인데, 이곳에 사무실을 두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좋은 전시가 보이면 쓱 들러 구경하고 올 수 있다는 것. 신기하게도 전시를 보고 나면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업무 중 아이디어가 막힐 때마다 “아이디어 회의 하자” 대신 “우리 산책 다녀올까”라고 말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 근무 환경인가.
15분 산책으로 누리는 영감의 일상화. 이런 일이 도시 전체에서 가능한 곳이 있다.
10분마다 만나는 박물관, 바젤의 일상 풍경
스위스 바젤을 걷다 보면 10분마다 박물관을 마주친다. 서울 용산구(21.87km²)보다 조금 큰 면적(23.91km²)에 4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라인강 변의 유스 호스텔에 숙소를 정하고 중심부로 걸어 나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박물관이 하나씩 나타났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바젤 문화 박물관(Museum der Kulturen Basel)이었다. 지붕 모양부터 범상치 않다. 주변 주택들 지붕과 닮은 듯 안 닮은 듯, 알쏭달쏭해서 한참을 올려다봤다. 세계적인 건축가 헤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설계한 건물인데, 닮은 듯 안 닮은 ‘알쏭달쏭함’을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메모해뒀다.
걸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도시.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젤에서 살기를 꿈꾸지 않을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화 시설이 한곳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즉, 도시의 ‘박물관 밀도’가 높은 덕분이다.

직주락문이 겹쳐지는 도시 풍경
바젤을 걸으면 자주 마주치는 건물이 또 있다. 첨단 바이오 산업의 사무실들이다. 박물관을 나와 라인 강변을 따라 15분쯤 걷자, 세계적인 제약 회사 로슈(Hoffmann-La Roche)의 본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역시 헤르초크 & 드 뫼롱이 설계했는데, 조금 전 알쏭달쏭 지붕과는 전혀 다른, 백색 거인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다.

강을 따라가면 또 다른 제약 회사 노바티스(Novartis)1가 캠퍼스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바젤에만 700여 개의 제약·바이오 기술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이처럼 글로벌 첨단 기업이 스위스의 비싼 물가에도 불구하고 바젤을 일터로 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사무실을 정할 때는 도시의 교통과 물류 등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입지를 택한다. 그런데 첨단 기술 기업의 경우 단순한 교통과 물류 같은 비용적 이득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우수한 인재를 구하기 쉬운 도시에 위치해야 한다.
지식 근로자, 전문가, 예술가 등 창의 계층은 회사를 선택할 때 연봉만 보지 않는다. 사무실이 위치한 도시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지 함께 고려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직職-주住-락樂의 근접성이다. 일하고, 살고, 노는 일이 한 곳에서 해결되는 도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문文, 즉 문화 활동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 있는 미술관, 개성 넘치는 공연장이 근처에 있어야 자신의 창의력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 팩터가 도시의 경쟁력이 되는 순간
이들을 직원으로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는 글로벌 첨단 기업들은 사무실의 위치를 정할 때 삶의 질, 지역 이미지, 문화적 편의 시설 같은 소프트 팩터(Soft Location Factors)를 중시한다.
바젤은 소프트 팩터에 최적으로 부합되는 도시다. 촘촘히 도시에 퍼져있는 박물관뿐 아니라, 마리오 보타, 디너 & 디너, 헤르초크 & 드 뫼롱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명작 건물이 동네 건물처럼 곳곳에 서 있다.
박물관과 건축 밀도가 창의 인재 유치의 소프트 팩터로 작용하고, 다시 기업들은 도시에 문화 투자를 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중도시의 경쟁력, 박물관 밀도에 있다
그럼 살기 좋은 도시의 조건, 살고 싶은 중도시의 관점에서 박물관 밀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네덜란드 알메르를 다룬 지난 글에서 중도시의 개념을 소개했다. 앞으로 계속 소개할 중도시란, 모든 것을 다 가진 대도시도 결핍을 극복해야 하는 소도시도 아닌 ‘적당한 인구와 규모를 가지면서도 보행거리 내에 있을 건 다 있는 도시’이다. 동시에 중도시가 매력적인 도시 발전 전략을 실행하기에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직주락문 근접성과 첨단기업의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은 중규모 도시의 전략으로 적합하다. 대도시는 이미 문화밀도가 높지만 공장이나 연구소 같은 생산시설을 근접해 짓기 어렵다. 소도시는 문화시설을 촘촘히 짓기에는 인구와 인프라가 부족하다. 반면 중도시는 박물관 밀도와 첨단 산업의 밀도를 한 곳에 모을 가능성이 있다.
첨단산업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 중도시라면 단순히 산업 단지 조성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근접한 곳에 문화밀도를 높여 직주락문의 근접성을 만들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첨단 클러스터인 판교는 바젤과 비슷한 규모의 IT 단지이지만, 문화 시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무실과 상업 시설만 섞여 있어 일상의 영감을 얻기 어렵다. 내가 사는 도시가 나의 창의력을 좌우한다. 상가에 둘러싸여 있으면 상가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아파트에 둘러싸여 살면 아파트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매일의 입력값이 평범한데 어찌 비범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겠는가.
서울의 강서구에 위치한 마곡지구는 첨단산업과 자족도시로 개발되었다. LG 아트센터와 서울 식물원 등 문화시설이 있지만 대형 시설이 한곳에 집중된 형태다. 바젤처럼 중소형 뮤지엄과 갤러리가 곳곳에 들어서야 창의적인 인재들이 서로 섞이며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다. 산업 유치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이 좋아하는 문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도시의 경쟁력이다.

시민의 발걸음으로 만드는 문화의 도시
어쩌다가 바젤은 이렇게 문화 밀도가 높은 도시가 됐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7년의 ‘피카소 사건’, 즉 시민들이 똘똘 뭉쳐 피카소를 구출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바젤 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피카소 작품 두 점이 재정난으로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 이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모금하기 시작했고, 결국 피카소의 작품을 도시가 다시 사들일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피카소가 감동해 바젤 시민에게 자신의 작품 두 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이후 바젤은 ‘시민이 예술을 구한 도시’로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문화에 대한 시민 참여와 자부심이 도시의 정체성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시민 주도의 문화 전통은 1970년 세계 최대 아트 페어 ‘아트 바젤(Art Basel)’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현재 아트 바젤은 마이애미, 홍콩, 파리로 확장되며 바젤을 글로벌 예술 수도로 각인시켰다.
거대한 랜드마크 박물관 하나를 짓는 일은 정치인이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의 박물관 밀도를 높이는 일은 시민의 자각이 필요하다. 실천 방법은 간단하다. 주변에 갤러리가 생겼을 때 ‘나랑은 상관없는 곳’이라며 지나치지 말고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림을 사진 않더라도 공짜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도시의 문화 밀도는 시민이 만든다. 오늘, 점심 산책길에 회사 팀원들과 함께 근처 갤러리 문을 한 번 열어보자.
도시 개발자를 위한 교훈: ‘박물관 밀도’를 자산 가치로 전환하는 법
바젤은 문화 시설 투자가 고부가가치 기업 유치라는 확실한 ‘자산 투자 전략’임을 보여준다. 단일 대지 개발자도 고려해 봄직한 현실적인 실행 방안을 제안한다.
- 네트워크형의 직주락문 배치: 대형 시설로 집중하는 것보다 보행 동선에 작고 촘촘하게
단순히 한 곳에 대형 랜드마크를 짓는 대신, 보행 동선을 따라 중소형 뮤지엄, 갤러리, 독립 서점 등을 분산 배치해야 한다. 문화 시설을 ‘일상에서 지나치는 곳’으로 만들어 체류 시간을 늘리면 주변 상업 시설의 공실률을 낮추는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소프트 앵커 유치: 창의 계층에 대한 전략적 공간 지원
대형 오피스 타운 개발 시, 상업 층의 구석이나 접근성이 낮은 공간(예: 지하, 비주력층)을 ‘창의 계층 지원 프로그램’으로 활용한다. 건축가, 디자이너, 출판사, 예술가 등의 작업실이나 갤러리에 파격적인 저렴한 임대료를 제공하여 이들을 유치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분위기는 곧 건물 전체의 소프트 밸류(Soft Value)를 높이고, 고소득 인재를 끌어들이는 자기장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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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025년 12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시장 환경 등에 따라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
- 1996년 스위스 화학, 제약, 의료업체인 시바 가이기(Ciba-Geigy)와 산도스(Sandoz)의 합병을 통해 설립된 제약 기업으로 로슈와 더불어 바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제약, 눈 건강, 유전자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