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해리포터>의 9와 3/4 승강장으로 유명한 킹스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 인근은 런던 최대 환승역 중 한곳이자 상업과 업무, 주거가 집적된 역동적인 동네입니다.

  • 1990년대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음침한 구역”으로 여겨졌지만, 지속가능성과 시민을 모이게 만드는 플레이스메이킹 설계로 완전히 탈바꿈했죠.

  • 런던에 거주하는 박종민 건축가가 직접 경험한 킹스크로스의 변화 과정을 들려드립니다.

킹스크로스(King’s Cross)는 흔히 런던에서 가장 크고 성공한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로 꼽힙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산업 부지가 새로운 거리, 광장, 공원, 주거지, 상점, 사무실, 갤러리, 바, 레스토랑, 학교, 심지어 대학교까지 포함된 활기찬 지역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활기찬 동네였던 건 아닙니다.

제가 이곳을 처음 찾은 건 2006년입니다. 해리포터가 한창 유행하던 때라 친구들과 함께 9와 3/4 플랫폼 앞에서 사진을 찍으러 왔었죠. 당시 킹스크로스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중앙역 근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창고와 적재소, 철도 주변 특유의 거칠고 낡은 분위기가 전부였습니다.

유로스타도 워털루역에서 출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유로스타는 런던과 파리를 연결하는 국제 고속열차로, 원래 워털루역에서 출발했으나 2007년 세인트 판크라스역으로 이전되면서부터 이 역과 나란히 연결된 킹스크로스역까지 대규모 환승역으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죠. 제가 방문할 당시만 해도 킹스크로스역은 지금처럼 북적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2017년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이끄는 헤더윅 스튜디오(Heatherwick Studio)가 설계한 콜드드롭 야드(Coal Drops Yard)가 완공되며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저층부에는 톰 딕슨(Tom Dixon) 쇼룸과 세련된 상점, 감각적인 카페들이 들어섰고, 상층부에는 삼성 플래그십 스토어까지 입주했죠. 주말이면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 학교 앞 중앙 분수 광장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연인들은 운하를 따라 산책하거나 야외 영화 상영을 즐기곤 합니다. 이곳은 어느새 런던 시민들의 주말 약속 장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며 다시 찾은 2025년의 킹스크로스는 예전보다 훨씬 정돈되고, 성숙한 분위기였습니다. 여전히 활기차지만, 동시에 제법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동네 같았습니다. 특히 완공을 앞둔 구글(Google)의 유럽 본사는 헤더윅 스튜디오와 덴마크 건축사무소 BIG(Bjarke Ingels Group)의 협업으로 다시 한번 이 지역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었습니다. 콜드드롭 야드 주변으로 새로운 주거지와 사무 공간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으며, 오픈 초기의 신선함은 어느새 이곳의 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킹스크로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에서부터 재개발의 현장, 그리고 지금 이곳이 품고 있는 삶의 결까지 천천히 걸으며 느낀 이야기들을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19세기 물류거점, “음침한 구역”으로 쇠퇴하다

킹스크로스는 200년 이상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은 지역입니다. 1820년 리젠트 운하(Regent’s Canal)가 완공되면서 잉글랜드 북부 산업 도시들과 연결되는 물류 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철도망이 확장되며 석탄, 곡물, 사람과 산업이 이 지역으로 집중되었고, 철도와 운하가 교차하는 킹스크로스는 곧 런던을 지탱하는 물류의 심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 구조가 급변하면서 이 지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20세기 말까지 킹스크로스는 황폐한 건물, 방치된 창고, 오염된 토지와 낙후된 기반시설로 가득한 지역으로 전락했고, 런던 안에서도 ‘기피하는 장소’ 로 인식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젊은 예술가들과 밤문화의 중심지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높은 실업률, 마약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얽히며 지역 발전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2017년 5월 16일자 <가디언(The Guardian)> 기사는 킹스크로스를 “런던의 음침한 구역이자 파티, 에이즈, 범죄 등이 문제되는 지역”으로 표현할 정도였죠.

이러한 언론 보도와 사회적 인식은 킹스크로스를 ‘재정비가 반드시 필요한 공간’으로 각인시키며, 본격적인 재개발 논의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됩니다.

유로스타 종착역으로 시작된 부지 재편

킹스크로스 지역 재개발은 1996년 유로스타(Eurostar)의 종착역이 워털루역에서 세인트판크라스역(St Pancras International)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되면서 시작됩니다. 이곳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런던 & 콘티넨탈 철도(London & Continental Railways Limited)와 엑셀(Excel, 현 DHL)이 영국의 민간 개발사 아전트(Argent)를 파트너로 선정해 본격적인 재개발 계획에 착수했지요. 그리고 세 회사가 공동으로 킹스크로스 센트럴 리미티드 파트너십(King’s Cross Central Limited Partnership, KCCLP)을 결성하여 지역의 토지 소유주로 재개발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약 25억 파운드(약 4조 2500억원) 이상이 교통 인프라에 투자되었으며, 2007년에는 세인트판크라스 국제역이 개통되며 미들랜드 그랜드 호텔(현 세인트판크라스 르네상스 호텔) 등의 복원과 재개장이 이뤄집니다.

2011년에는 런던예술대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Central Saint Martins)가 킹스크로스 그래너리 빌딩(Granary Building)으로 이전하며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로 역할을 강화했고, 2018년에는 콜드드롭 야드의 상업·문화 공간, 오피스가 속속 들어섰습니다. 그레이트 노던 호텔의 리노베이션도 함께 진행되며 킹스크로스는 런던 도심 속 새로운 문화·상업 중심지로 변모하게 됩니다.

지속가능성과 시민을 중심에 둔 성공 사례

2025년 현재, 킹스크로스는 단순히 낙후된 지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지역민을 중심에 둔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2021년 11월, 킹스크로스는 탄소중립을 달성했으며, 100% 재생에너지로 운영되는 건물을 통해 연간 약 19,729톤의 CO₂ 배출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건설 과정에서는 콘크리트, 철강, 목재 등 주요 자재의 임베디드 카본을 최소화하기 위한 철저한 관리가 이뤄졌습니다. 또한 지하에는 지역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대한 인프라(난방 및 온수 파이프, 전선망 등)를 설치해 중앙 공급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더불어 부지 면적의 약 7.5배에 달하는 곳에 6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60년간 약 15만 3천 톤의 탄소를 상쇄할 계획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숫자 이상의 가치가 중요한 곳이 킹스크로스입니다. 2024년 ESG 보고서에 따르면, 리젠트 운하 주변에 정원과 정원을 조성해서 도심 속 녹색 오아시스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공 광장과 조경 사이에는 예술 작품이 배치되어 시민 누구나 야외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죠.

리젠트 운하는 라임하우스 베이슨에서 리틀 베니스까지 이어지는 8.5마일의 수로로, 킹스크로스는 그 출발점이자 도착지입니다. 운하 근처에는 영국 조경가 톰 스튜어트 스미스가 설계한 페르시아식 정원, 가스 저장고를 유지한 가스홀더 파크(Gasholder Park), 유럽식 광장 같은 판크라스 스퀘어, 가족과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루이스 큐빗 파크(Lewis Cubitt Park) 등 다양한 조경 공간이 조성되어 사람들의 유입을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킹스크로스는 ‘사람 중심 도시의 10대 원칙(Principles for a Humane City, 2001)’을 발표했는데요. 이 원칙들은 단순한 도시 재생을 넘어, 사람과 장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도시 모델로서 킹스크로스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줍니다.

10년 후가 더 기대되는 킹스크로스

제가 한국과 런던에서 도시 재생 사업들을 관찰하며 느낀 점은, 수 년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드는 성공적인 재개발 프로젝트에는 결국 세 가지 요소—건축적 매력, 탄탄한 커뮤니티, 그리고 지속가능한 운영 모델—이 조화를 이룬다는 겁니다.

킹스크로스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지역 자선단체 및 커뮤니티와 연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런던 와일드라이프 트러스트(London Wildlife Trust)는 가족 대상 ‘패밀리 펀데이(Family Funday)’를 열어 야생동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자연보호 활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트라이앵글(Triangle) 부지에서는 자원봉사자와 구직자를 위한 실습 및 훈련 기회를 제공하여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글로벌 제너레이션(Global Generation)은 ‘스킵 가든(Skip Garden)’이라는 도시 농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지역 주민, 기업과 협력해 도시 농업을 교육하고 있고요.

킹스크로스는 산업도시에서 쇠퇴를 거쳐, 이제는 사람과 도시, 자연이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도시 재생의 벤치마킹 사례가 된 이곳이 10년 뒤에는 얼마나 풍성한 지역으로 진화할지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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