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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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 서울 아모레퍼시픽 뮤지엄에서 2025년 2월 23일까지 개인전
을 개최합니다. 실제 크기의 집, 수영장, 레스토랑 등 대규모 설치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인데요. -
전시를 기념해 두 아티스트가 현대미술계 스타로 자리 잡기까지의 여정과 예술언어를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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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종료 후에도 강남 역삼동의 대형 복합건물 ‘센터필드’ 공개 부지에서 이들의 대표작(8 Pool)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은 이제는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처럼 각인된 현대미술계의 스타 듀오입니다. 덴마크 출신의 미카엘 엘름그린(Michael Elmgreen,1961년~ )과 노르웨이 태생의 잉가 드라그셋(Ingard Dragset, 1969~)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4년 코펜하겐의 애프터 다크(After Dark)라는 게이 클럽에서 처음 만났는데 알고 보니 둘이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는 이웃이었고, 곧 연인이 되었으며, 이듬해 아티스트 듀오를 결성했습니다. 당시 엘름그린은 시를 쓰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으며, 실내 장식 이력도 지니고 있었고, 드라그셋은 연극을 파고들고 있었다고 하지요.
필자가 이 듀오를 처음으로 직접 본 건 2015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태평로의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그들의 전시 <천 개의 플라토 공항>이 열리면서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에서였지요. 정규 미술 교육을 따로 받지 않은 제도권 바깥의 젊은이들이 뭉친, ‘시인 출신 예술가와 연극인’ 조합이라는 출발점이 뇌리에 박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시각 예술 경험을 갖춘 미카엘 엘름그린과 연극 무대 경험을 쌓은 잉가 드라그셋이 각자의 배경을 참 영리하게 결합해 작업 세계를 구축해나갔다는 감상과 함께요.
이 글은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듀오가 오늘날 글로벌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브랜드’가 되기까지의 초반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봅니다. 작가들이 그들만의 문법과 언어를 구축한 초기 배경을 알아가면 2024년 9월 3일부터 2025년 2월 23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열리는 <스페이스(Spaces)> 전시를 관람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도권 밖에서 온 아티스트 듀오의 시너지
듀오가 대중 앞에 선보인 첫 작품은 1995년 스톡홀롬에서 펼친 퍼포먼스였습니다. ‘추상적인 애완 동물’이라는 가정 아래 관객이 안아주고 돌보고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는 하얀 천을 길게 짜는 퍼포먼스(knitting performance)였는데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유명 아티스트들은 이 사람의 펜을 거치지 않은 경우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 중독자’로 유명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를 보면, 사실 이들은 애초에 퍼포먼스로 구상한 건 아니었지만 오프닝 당시 누구도 자신들이 의도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해 직접 시연을 했더니, 모두들 퍼포먼스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첫 행위 예술 작품이 우연히 탄생하게 됐다는 얘기이지요.
평론가 섀년 잭슨(Shannon Jackson)은 ‘극장, 무대(theatre)’라는 단어의 어원이 ‘구경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a place for viewing)’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당시 이들의 퍼포먼스를 되짚어보며 관객들을 극의 감상자로 변모시킬 만한 연극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퍼포먼스는 서로의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이었다. 뭔가를 함께 하는 것, 이런저런 활동과 작업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였지 그게 예술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술가의 항해술> 엘름그린&드라그셋 문답 중에서
이를 계기로 이들은 열심히 퍼포먼스 아트를 해 나갑니다. 한동안 재미난 퍼포먼스를 한 줌 보태며 전시 환경의 경직된 분위기를 녹여주는 ‘게이 커플’ 아티스트로 소개되는 시기를 거치죠. 그러다가 12시간 동안토미 룬드(Galleri Tommy Lund)라는 덴마크 갤러리의 벽에 흰 색 페인트를 칠하거나 호스로 물을 흩뿌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기념비적인 ‘무력한 구조물(Powerless Structures)’ 연작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화이트 큐브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흰 색 페인트로 갤러리를 덮어 버림으로써 화이트 큐브의 초월적 특성을 제거하고, 그 공간을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생한 현실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APMA 도록의 서문에 실린 큐레이터(손유경, 윤지은)의 문장입니다.
기존의 구조에 내재된 힘과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던 이 연작의 제목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권력 구조’ 개념에 영향받아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구조 자체는 바뀔 수 있는데, 우리가 권력을 유지하는 구조물을 받아들이는 한, 권력은 현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푸코의 생각이 실마리가 되어 모든 종류의 물리적, 건축적 요소들, 장소와 사물의 쓰임에 관련된 사회적 관습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입니다(APMA 도록에서 발췌).
또한 미니멀리즘을 다른 맥락에서 활용해 기성 예술 세계에 반기를 드는 식의 비틀기는 쿠바계 미국 아티스트로 성소수자로 사회적 편견에 맞섰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같은 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력한 구조물’ 시리즈 중에서 공간의 용도나 해석을 기존의 것과 달리하며 자신들의 정체성도 녹인 작품인 ‘크루징 파빌리온/무력한 구조물, 피그.55(Cruising Pavilion/Powerless Structures, fig. 55)’도 흥미롭습니다. 공공의 장소인 숲속에 흰 미니멀리즘 구성이 단적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을 설치하고 마치 게이들이 밀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상정한 작품입니다.
관람객들을 참여적으로 이끄는 이 ‘공공 조각’ 작품은 20세기 게이 문화에 크나큰 자취를 남긴 핀란드 출신의 예술가 토우코 라크소넨의 얘기를 다룬 영화 <톰 오브 핀란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 워홀에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의 전기 영화라는 문구만 보고 관람을 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원에서 짝을 찾는 동성애자들이 경찰에 발각되고 구타당하는, 요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보수적이었던 북유럽(핀란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국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지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힘들어했던 토우코 라크소넨은 ‘톰 오브 핀란드’라는 예명으로 금지된 욕망을 담은 일러스트를 그리다가 미국에 작품이 알려지면서 역량을 인정받게 되는데요, 시대의 간격은 있지만 엘름그린과 드라그셋도 이성애적 규범이 당연시되는 스칸디나비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기에 동성애자로 소외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물리적 요소, 사회적 관습을 뒤집어 보는 태도가 생겼다고 합니다.
‘공간’의 전략적 전복과 무궁무진한 확장성
1997년 베를린으로 스튜디오를 옮긴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공간을 본격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공공과 사적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 공간의 용도를 변형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갤러리나 미술관의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전시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듀오 특유의 연극성이 돋보이는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는 방식은 ‘확장성’이 빼어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APMA 전시 프리뷰에 등장한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공간을 변형해 관객들이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고 싶다”며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연극적인 장치를 풀어놓되 각자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풀어내도록 관객에게 여지를 주고, 몰입을 시켜 능동적으로 참여도 하게 하는 ‘오픈 엔드’형 공간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APMA 전시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등장하는데(그들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 중 하나죠), 잘 보면 물이 없이 비어 있고 그 안의 사람들은 VR 고글을 쓰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 고립된 채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활동이 일어나야 하는 곳이지만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고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단순히 오브제를 뒤트는 식으로 아이러니를 재치 있게 빚어내기도 합니다. 예컨대 APMA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난 장화 같은 예를 들 수 있겠지요. 미술계에 속하지 않았기에 관행적인 미술 문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또 그러한 자신들의 배경을 잘 활용했습니다. 현대미술은 어차피 기존 질서와 체제, 규범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는 영민한 전략적 전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문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혹은 작게나마 자극을 받아 각자 나름대로 의문을 제기해보기 바랄 따름이다.
<예술가의 항해술> 엘름그린&드라그셋 문답 중에서
초기 퍼포먼스에 이어 공간을 놓고 다양한 시도를 하던 이 듀오가 대중의 관심까지 끌어 모으게 된 계기는 2005년 ‘프라다 마르파(Prada Marfa)’ 프로젝트입니다. 미국 텍사스의 인적 드문 마르파, 하지만 세계적인 작가 도널드 저드 재단이 자리하고 있어 예술 애호가들에게는 성지 순례지의 하나로 꼽히는 이 마을의 사막을 배경으로 한 도로 한가운데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매장으로 보이는 장소특정적 설치 작품을 놓아두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매장이 아니었죠.
이는 앞서 2001년 ‘오프닝 순—프라다( Opening soon—Prada)’라는 작업이 시발점입니다. 뉴욕의 타냐 보낙더(Tanya Bonakdar) 갤러리 앞에 ‘곧 문을 연다’는 메시지가 걸리면서 행인들이 프라다 매장이 들어서거나 관련 전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 문의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요. 당시 브랜드와의 사전 협의가 없었지만 프라다에서 전혀 항의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현대미술을 후원하는 메세나의 원조 대열에 꼽히는 브랜드인 프라다를 이끄는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가끔씩 ‘아트’를 위해 패션 사업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인물이니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마르파 프로젝트 때 미우치다 프라다는 가방과 구두를 협찬해줄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요.
소비 지상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튼 프라다 마르파 프로젝트를 보면,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의 인터뷰 문구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미술 시장을 힘들게 하고 툭하면 바람을 피우는 애인과 같다. ‘너를 먹여주는 손을 물지 마라’고들 하지만, 깨무는 게 섹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브랜드의 위상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 같은 철저한 계산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APMA 전시를 위한 내한 간담회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은 2005년 당시 페이스북은 있었지만 인스타그램은 아직 나오기 전이라서 저희는 이 작업이 약간 비밀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겨지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이 등장했고 비욘세가 그 앞에 가서 사진을 찍어서 올리게 되고 <가십걸>이라는 TV 쇼에도 등장을 하게 되고…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창작해 낸 작품이 미디어의 물결에 쓸려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한 가지 후일담을 덧붙이자면, 원래 이 듀오가 생각했던 장소는 네바다 주였다고 합니다. ‘Prada-Nevada’ 식으로 운(rhyme)을 맞추려고 했지만, 네바다 주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네요.
베니스, 뉴욕, 이스탄불, 프라다 재단(밀라노), 그리고 다시 서울로…
프라다 마르파 프로젝트로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듀오의 브랜드 가치는 수직 상승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물론 “행운은 준비와 기회가 만날 때 생기는 것”이라는 금언을 기억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들은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덴마크관과 북유럽관을 동시에 합친 큐레이팅을 맡아 부동산 매물로 나온 어떤 미술 컬렉터 자택의 수영장에 시체 한 구가 둥둥 터 있는 <더 콜렉터(The Collector)>라는 전시로 호평을 받고, 뉴욕에서는 록펠러 센터 입구에 수직으로 서 있는 수영장의 형태를 한 ‘반 고흐의 귀(Van Gogh’s Ear’)라는 초현실적인 느낌의 작품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며, 2017년 가을 열린 이스탄불 비엔날레에서는 예술가가 아닌 기획자(총괄 큐레이터)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2022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프라다 재단 미술관(Fondazione Prada)에서 <쓸모없는 몸들? Useless Bodies?> 전을 열었습니다. 2015년 밀라노 남동쪽의 라르고 이사르코에 건축 거장 렘 콜하우스가 이끄는 OMA가 설계한 프라드 재단이 새로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네 군데 전시 공간과 야외 공간까지 수놓은 대대적인 전시였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텅 빈 사무실 같은 일상의 공간에 인간의 ‘몸’이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짐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을 조명한 전시로, 사실 기획 자체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뤄졌다지만, 공간에 대한 많은 생각을 던져준 시기였던지라 꽤 울림 있는 ‘유효타’가 되었지요.
이 듀오의 작업 방식에서 느껴지는 영리한 장점 중 하나는 ‘기존의 것을 비튼다’는 개념 덕분에 여러 모티브가 살짝 변형해 계속 등장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확장성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데, 예컨대 수영장은 베니스 → 뉴욕 → 서울 등에서 열린 전시에서 약간씩 다른 형태와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지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울에 이들의 작품을 무료로 만나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요. 강남 삼성동의 대형 복합건물 ‘센터필드’ 공개 부지에는 엘름그린&드라그셋이 수영장을 모티브로 만든 대형 조각 작품 ‘8 수영장 (8 Pool)’(2020)이 영구 설치되어 있습니다.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들러서 구경해보도 좋을 듯 합니다.
조각, 설치, 오브제 등 다매체를 활용하고 공간을 변주하며, 그들의 브랜드가 점점 더 힘을 얻어가면서 그 공간의 스펙터클의 ‘강도’까지 키워나가면서 전시 자체의 매력이 있고, 생각할 거리도 던져줍니다.
APMA 전시는 일종의 서베이 전시인 만큼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듀오의 폭넓은 작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리고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씬을 겪어본 뒤 영감을 받아 선보였다는 신작 ‘더 클라우드The Cloud’(2024) 등도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좋은 기회임은 분명합니다. 이번 전시의 대형 설치 작품에 사용된 재료의 여분을 활용해 제작한 타일, 다시 말해 ’업사이클링’ 기념품을 관람객에게 선물하는 현장 이벤트라는 친환경 마케팅 아이디어도 센스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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