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이탈리아 볼로냐는 정문도 담장도 없는 ‘분산형 캠퍼스’ 구조로, 대학 건물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주거·상업·학문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주상학(住商學) 복합도시입니다.

  • 인구의 4분의 1이 대학 관련 인구인 볼로냐는 매년 신입생을 수혈받으며 천년 역사에도 젊은 활력을 유지하고, 세대 간 교류가 일상화된 도시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 고령화를 겪는 중도시는 대학을 고립된 섬이 아닌 도시의 엔진으로 삼아, 캠퍼스와 도시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형 도시 회춘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해볼까?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생각이지만, 막상 이주를 결심하면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마땅한 집이 없다는 것.

얼마 전 경상남도 남해군의 요청으로 지역 주거난의 해결책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남해군의 경우, 특히 1인 청년층이 살만한 주거가 부족해서 1~2년 살아보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구절벽과 고령화를 겪고 있는 남해군으로서는 꼭 붙잡고 싶은 사람들인데 말이다.

현장 조사 중 우연히 남해도립대학교 총장과 차를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총장은 지역 대학의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기숙사가 비어 있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주 1인 가구가 기숙사에 살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대학은 공실을 해결하고, 거주자는 주거난을 덜며, 도시는 젊은 인구를 유치하는 상생 모델이다.

그런데 이 모델은 의외로 오래된 도시에 사례가 있다. 천 년 역사의 도시, 이탈리아 볼로냐를 소개한다.

이탈리아 볼로냐 여행의 출발점, 레엔초(Palazzo Re Enzo)과 마조레 광장. 겉보기에는 평범한 중세 도시지만 광장과 상점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이탈리아의 다른 역사 도시와는 다른, 젊은 활기가 느껴진다. (출처=www.bolognawelcome.com/)

정문 없는 학교, 주상학 복합도시의 풍경

우리나라에서는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 온 가족이 정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볼로냐 대학에 입학한다면 이런 촬영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부터 학교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정문도, 담장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캠퍼스다. 설립 당시 볼로냐 대학은 독립된 건물이 없이 개인 주택이나 공공장소를 빌려 수업을 했는데 이런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볼로냐의 오래된 주거 건물 입구 문패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과 마주친다. 각 층으로 연결된 초인종 옆에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 3층 A호에는 ‘로씨네 가족’이 살고, 바로 위 4층 B호에는 ‘철학과 과사무실’이 있다. 대학 건물이 특정 구역에 모여 있지 않고 도시 곳곳에 퍼져 있기 때문인데, 이름을 붙이자면 ‘분산형 캠퍼스’다. 위층에는 주거와 학교, 1층에는 빵집이나 식당이 입점해 있는 건물이 흔하다.

볼로냐 시내 전경. 사진=Petr Slováček

이러다 보니 대학의 활기를 도시 어디서나 느낄 수 있다. 한 편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배낭을 맨 채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대학생들이다. 이들이 모여있는 잠보니 거리(Via Zamboni)를 따라 걸어보자. 

대학 본부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에 대학 부속 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수십 개의 학생 단골 바가 엉켜 있다. 그래피티로 가득한 벽, 자전거를 타고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걷는 노학자. 주거와 상업에 ‘학문(學)’이 더해진 주상학(住商學) 복합 도시의 풍경이다.

도시 중심부 ‘게토’ 지역을 유대교의 상징인 손 모양으로 표시한 지도. 학생, 주민, 관광객 섞여 북적이는 구역이다. (사진=조성익)

62km의 지붕, 포르티코: 도시 전체를 복도로 만들다

볼로냐에서 걷다 보면 비를 맞지 않고 도시를 횡단할 수 있다. 도시 중심부와 교외를 포함해 총 62km에 달하는 지붕 있는 보행로, 포르티코(Portico)1 덕분이다.

포르티코는 보행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지붕 아래 앉아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다. 지붕이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실제로 짙은 그림자 속에 앉아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셔보니, 포르티코를 받치는 돌기둥 사이로 보이는 밝은 가로의 풍경이 더욱 활기차 보였다. 빛과 어둠의 대조 효과다. 조금 전 학생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수다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포르티코가 만드는 아늑한 환경 덕분이다.

포르티코에서 휴식 중인 시민들의 모습. 사진=Caio Fernandes

볼로냐 대학교는 1088년에 세워진 서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중세 시대,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하숙집을 제공하기 위해 건물 2층을 도로 쪽으로 돌출시켜 증축했고, 그 아래 생긴 회랑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도시를 대표하는 독특한 구조가 학생들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학생들은 집에서 카페로 가는 길도, 법학부 건물로 가는 길도 모두 포르티코 아래를 지나게 되니 하루에도 수십 번 이 길을 지나다 보면 ‘도시=캠퍼스’라는 인식이 생긴다. 로씨네와 과 사무실이 수직으로 하나의 캠퍼스를 이루고, 포르티코로 연결된 학교와 카페가 수평으로 하나의 캠퍼스를 이루고 있으니, ‘도시 전체가 캠퍼스’라는 말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중세 시대부터 이어내려 온 볼로냐의 포르티코는 수백년간 만남의 포인트, 점심 식사 장소, 열띤 토론의 무대가 되었다. (사진=조성익)

천년 도시의 엔진: 매해 신입생을 수혈받는 ‘미식과 지성’의 공간

볼로냐 하면 맛있는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음식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도 유난히 볼로냐는 미식으로 이름난 곳이다. 가장 알려진 요리는 고기를 잔뜩 넣고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끓인 라구 볼로네제(Tagliatelle al Ragù)다.

맛의 도시에 왔으니 식당을 하나 골라 점심을 먹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식당에 자리를 잡으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한두 시간은 너끈히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의 나라 꼬레아(Corea)에서 온, 그것도 점심은 전투적으로 먹는 내게 이탈리아의 느린 식사 문화는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희한하게도 볼로냐에서 내가 고른 식당은 대부분 손님들이 후루룩 먹고 빨리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대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격식을 갖춘 리스토란테(Ristorante)보다는 캐주얼 식당들이 많이 자리 잡으면서 생긴 문화인 듯하다.

볼로냐 시내 인구 약 39만 명 중 8만~10만 명이 대학 관련 인구다. 인구의 4분의 1이 학생과 연구자이다 보니 도시의 개방적 문화, 진보적 정치 성향, 심지어 저렴한 물가까지 도시가 대학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대학생들은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 아니라 도시의 활력을 유지하는 ‘핵심 엔진’이다. 천년 도시가 매해 신입생들을 받으며 세대의 입맛에 맞게 변신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식사를 하고 인근 골목을 둘러보니 젊은 세대와 고령층의 취향을 모두 고려한, 신구가 조화로운 상업 가로가 이어졌다. 젊은 디자이너의 숍과 골동품 상점이 나란히 있고, 실험적인 전시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오래된 도시 전통과 젊은이의 에너지가 부딪치며 가로에 활기를 주고 있었다.

메르카토 델레 에르베(Mercato delle Erbe)는 볼로냐에서 가장 큰 실내 시장으로, 신선한 지역 농산물, 육류, 치즈 등을 판매한다. 음식 노점과 식당이 있어 가볍게 식사하는 장소로도 인기가 많다. (사진=조성익)

신구의 조화는 건물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오래된 건물을 수리해 쓰는 멋진 공간 중 대표적인 곳이 살라보르사 도서관(Biblioteca Salaborsa)이다. 볼로냐 시청 건물 안에 위치한 이 도서관은 입지부터 상징적이다. 도시의 정중앙인 마조레 광장 바로 옆, 즉 도시의 가장 값비싼 자리를 백화점이나 오피스가 아닌 시민의 거실인 도서관이 차지하고 있다. 과거 은행과 거래소로 쓰이던 이 건물의 백미는 중앙 홀의 투명한 유리 바닥이다. 발밑을 내려다보면 로마 시대의 공공 집회장의 유적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그 유적 위에서 태연하게 리포트를 쓰는 대학생들과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도시의 공간만 옛것과 새것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대학 도시는 대학생의 도시가 아니다. ‘학문’ 공간과 ‘학문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세대 교류가 생기는 도시. 이것이 주상학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살라보르사 도서관. 오래된 목조 천장 구조를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되었고, 지하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 실내 광장으로 조성되어 지역 주민이 교류하는 장소다. (사진=조성익)

한국형 도시 회춘법

대학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지역의 엔진이 될 수 있다. 이는 국내 대학 캠퍼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송도 신도시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국제 캠퍼스를 보자. 연세대는 모든 1학년 학생을 인천 송도 캠퍼스에 머물게 한다. 송도는 공원과 쇼핑 시설 등 훌륭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다. 학생과 도시가 상생할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캠퍼스는 도시와 격리된 ‘고립된 섬’으로 설계되었다. 학생들이 주말마다 서울로 탈출하는 이유다. 

캠퍼스 주변만이라도 외부 상업시설과 학생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구간을 만들고, 볼로냐처럼 지붕으로 연결했다면 어땠을까. 학생들 간 활발한 교류가 생기는 독특한 캠퍼스가 되었을 것이다. 송도도 젊은 상업시설과 문화로 넘쳤을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볼로냐 모델을 확장할 기회는 지역 대학에 있다. 중규모 지역 도시 중에는 도시 중심에 대학이 있는 곳이 많다. 최근 강연을 하러 방문한 영남대는 거대한 캠퍼스에 산책로와 운동시설 등 잘 가꿔진 기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이 위치한 경산시와는 큰 연계가 없다. 꾸준히 인구가 늘고 있는 경산시와 영남대 캠퍼스의 경계를 허물어 도시에 젊은 피를 수혈하는 도시 회춘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남해에서 발견한 주상학의 미래

앞서 언급한 남해도립대 기숙사를 방문해 거주 중인 신입 공무원과 대화를 나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숙사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집이 해결되니, 이제는 저녁에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할 사람이 절실해요.”

신입 공무원의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주거는 침실 제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퇴근 후 저녁 식사, 주말 활동 등 주거를 둘러싼 삶의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집이 마련된다. 거주자들이 학생 식당과 체육관을 함께 이용하며 학생과 자연스럽게 이웃이 되는 주상학 복합 캠퍼스. 이것을 남해군에 제안했다.

주상학 복합도시는 단순히 도시를 젊게 꾸미고 대학생을 유치하는 전략을 넘어서야 한다. 배움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 열정이다. 배움을 통해 사람 간 유대가 생기고, 배움을 중심으로 생활과 상업이 확장되는 구조. 볼로냐는 고령화를 겪고 있는 중도시가 나아갈 지식 기반 세대 통합 모델의 해법을 제시한다. 

남해의 신입 공무원이 원했던 저녁 식탁의 교류, 그 해답은 포르티코 아래에서 남녀노소가 섞여 수백 년간 함께 식사를 해온 볼로냐의 전통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 결국 우리가 도시를 짓고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혼자서는 차릴 수 없는 ‘저녁 식탁의 온기’를 함께 나누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도시 개발자를 위한 교훈: 대학의 콘텐츠로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공간 협정’

  1. 대학 인근 상업·주거 복합시설을 기획할 때 대학과 ‘공간 협정’을 맺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가르치는 홍익대 건축대학에서는 졸업 작품전을 비롯한 학생 전시가 연중 열린다. 미술대학 전시까지 포함하면 연간 20회 이상이다. 대부분 캠퍼스 내 전시실을 1주일 단위로 빌려 쓰는데 공간이 부족하다. 대학 인근 오피스 개발 시 일부 공간을 학생 전시로 활용하면 어떨까. 학생들은 외부인에게 작품을 폭넓게 알릴 수 있고, 개발자는 저층부 공실에 콘텐츠를 채울 수 있다. 학생 전시는 가족, 지인, 업계 관계자라는 확실한 유동인구도 보장한다.
  2. 제도적으로 확대한다면 신축 건물 조성 시 로비나 저층부 일부 공유 공간 사용권을 지역 대학에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디벨로퍼는 용적률 인센티브나 세제 혜택을 받고, 대학은 저렴한 비용으로 도심 내 ‘쇼케이스’ 공간을 얻는다. 단순히 상가와 오피스가 섞인 건물이 아니라 ‘예술과 학문이 결합된 복합 문화 거점’이라는 이미지는 임대에도 긍정적 요소가 된다.

  1. 주랑 현관.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현관 또는 건물에서 확대된 주랑을 일컬으며 통로 위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기둥으로 지지하거나 벽이 둘러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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