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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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초여름,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은 조각 작품들로 가득 찬 야외 전시장으로 탈바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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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런던시가 주최해온 공공예술 프로젝트 ‘Sculpture in the City’는 예술이 어떻게 도시의 풍경과 인구 유동에 개입하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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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거주하는 박종민 건축가가 직접 행사에 참석하고 느낀 후기를 보내왔습니다.
런던 중심에 위치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영국의 대표적인 금융가입니다. 여의도와 비슷한 크기인 이 지역은, 평일에는 직장인으로 붐비지만 퇴근시간 이후와 주말이면 상당히 적막합니다. 주말에는 스타벅스마저 문을 닫죠. 런던시(City of London Corporation)는 이러한 도심공동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2011년부터 흥미로운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바로 Sculpture in the City입니다.
‘Sculpture in the City’는 시티 오브 런던 내 공공 공간에 현대 작품을 배치해서 도시 풍경을 재해석하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매년 열리는 이 행사는 시민에게 런던 금융 중심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하며, 도시에 활력을 더하는 역할을 합니다.
덕분에 이 지역에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지역 활성화를 기대하는 부동산 회사들이 행사 파트너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24년에는 브룩필드 프로퍼티, 누빈 등 상업용 부동산 회사들이 행사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건축설계 회사들의 이름도 보이고요. 런던 소재 건축사무소에 다니는 저 역시 회사 동료들과 함께 행사를 신청해서 다녀왔습니다.

런던시가 주최하는 무료 예술행사
‘Sculpture in the City’는 2011년 런던시(City of London Corporation)의 주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첫해에 4개의 작품으로 조촐하게 시작한 전시는 점차 그 규모를 키워 현재는 매년 약 15~20개의 작품을 선보이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합니다.
모든 전시는 무료이고,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서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살펴볼 수도 있고, 작품들이 공공장소에 설치된 만큼 직접 워크인으로 살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림 그리기 행사 등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도 많아서 성인과 아동이 함께 도시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왜 시티 오브 런던에서만 열릴까?
‘Sculpture in the City’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지역에서 열린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이 지역의 특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시티 오브 런던은 금융 중심지이지만, 주거 기능이 거의 없어 주말과 저녁이면 거리가 텅 비는 곳입니다. 이 행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도심을 문화적 경험이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시도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 코퍼레이션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시 정부뿐만 아니라 지역 내 기업과 갤러리가 후원하는 이유도, 금융 중심지가 단순한 업무 지구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가 함께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은 건축적으로도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킨(The Gherkin), 리든홀 빌딩(Leadenhall Building) 같은 현대적인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지만, 개별적인 건물보다 도시 전체의 흐름이 중요한 공간입니다. 런던에 오래 거주한 저 또한 이번 행사를 통해 시티 오브 런던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조각 작품과 도시 공간의 상호작용
제가 참여한 투어는 리든홀 빌딩 앞에서 시작했습니다. 영국 대표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설계한 이 건물은 치즈그레이터(The Cheesegrater)라는 애칭으로 시민들에게 불리기도 하는데요. 행사 기획자가 참여 작가들과 어떻게 장소를 선정하고 작품을 골랐는지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어 재미있게 들으며 감상했습니다.
무엇보다 각 작품에 담긴 메시지와 예술적 해석, 그리고 도시와 건축물이 에술과 어우러진다는 시각은 제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했습니다. 도시 속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끊임없는 질문과 통찰을 던지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와 차이는?
제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런던 건축물에도 예술 작품을 설치할 의무가 있냐는 것인데요. 한국의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와 비교하여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런던에서는 건축물 계획 시 공공예술 면적을 강제로 제공해야 하는 의무 규정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공예술 작품을 설치할 경우 몇 가지 이점을 기대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런던시 정부의 건축계획 심의 과정에서 공공 영역의 문화적 가치 증진과 공공 이익에 기여한 것으로 간주되어, 계획 허가 과정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영국 개발 허가 과정에서 적용되는 ‘Section 106’ 협약의 경우, 개발자가 지역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공공시설이나 주민을 위한 혜택을 협상할 때 공공예술이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네셔널 로터리 기금(National Lottery Fund)과 예술위원회 잉글랜드(Arts Council England, ACE)는 영국의 예술 및 문화 발전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이와 같은 도심 속 조각품 설치를 통해 도시 미관 개선 및 지역 활성화 등 가시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대 작가들의 설치 작품 돌아보기
Sculpture in the City는 무료 전시이지만 세계적인 작가들이 참여해 행사의 위상을 높입니다. 저는 특히 2018년 행사를 잊을 수 없는데요. 한국 서도호 작가의 작업이 전시된다는 소식에 아이와 함께 그의 작품을 보러 간 기억이 납니다. 런던 건물들 사이에 끼여있는 한옥의 모습은 타지에 머무르는 한국인으로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래는 그간 화제를 모은 작가와 설치 작품입니다.

서도호(Do Ho Suh, 한국)
<Bridging Home>
● 2018년, 리버풀 스트리트 보행자다리
● 한국의 전통 한옥 스타일의 집을 실제 크기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이 집은 마치 다리에 비스듬히 ‘떨어진’ 것처럼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런던의 이스트 엔드와 시티 오브 런던의 이주 역사를 탐구합니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영국)
<Your Lips Moved Across My Face>
● 2015년, 거킨(The Gherkin) 앞
● 내면의 상실과 슬픔을 표현한 네온 작품으로, 도시의 바쁜 풍경 속에서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세르비아)
<Tree>
● 2018년, 거킨(The Gherkin) 앞
● 퍼포먼스와 설치를 결합한 이 작품은 도시의 빠른 흐름 속에서 멈춤의 중요성을 탐구합니다.

야오이 쿠사마(Yayoi Kusama, 일본)
<Flowers That Bloom Tomorrow>
● 2012년, 런던 St Helen’s앞
● 스스로 증식하는 원형 모티프입니다. 이 모티프는 폴카 도트(Polka Dots) 또는 그와 반대로 그물(Net)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작가가 어린 시절 겪었던 환각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작품에서 이러한 점들과 소용돌이 무늬는 캔버스, 조각, 설치미술에 걸쳐 흘러넘치듯 표현되며, 색조와 성격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보입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영국)
<Charity>
● 2015년, 리버풀 스트리트 보행자다리
● 이 작품은 거대하지만 동시에 취약한 모습을 통해, 예술사에서 자선(Charity)의 미덕을 여성 형상으로 묘사해온 전통을 변주하고 있습니다.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영국)
<Parallel Field>
● 2014년, St Mary Axe앞
● 1990년에 처음으로 철로 제작한 조각중 하나로, 인간의 형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금속 조각을 통해 거리 위를 흐르는 인간의 움직임에 대조를 이룹니다.
제시 폴락(Jesse Pollock,영국)
작품 제목: The Granary
● 2024년, 런던 쿤나드 플레이스 근처
● 전통적인 영국 곡물저장고를 실제 크기로 표현한 조각작품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시골 지역에 사용되는 농업과 목가적 삶을 표현합니다.

이 외에도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매년 전시되며, 이 프로젝트는 점점 더 많은 예술가와 관람객들에게 사랑받는 축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런던 시민들은 행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런던 시민들은 이 행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행사의 리뷰를 찾아보니, 한 런던 거주자는 “출퇴근 길에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삶의 질이 향상된 느낌이다. 예술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하고요. 또 다른 시민은 “매년 전시되는 작품들이 달라져서 도시가 계속 새롭게 느껴진다”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일부 시민들은 “일부 작품들이 주변 환경과 조화롭지 않아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설치 위치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있다 보니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유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제가 참여한 해에는 5세부터 12세 아이를 위한 투어가 4차례 열렸습니다. 75분 정도 투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안내자와 함께 도시를 탐험하면서 시티 오브 런던이 삭막한 금융 구역이 아닌 친근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 아이는 나중에 시티 오브 런던의 한 건물을 지나가면서 ‘예전에 그림 그렸던 곳’이라며 재미있는 추억을 떠올리더군요.

도시의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행사
‘Sculpture in the City’는 단순한 예술 전시가 아니라, 도시 공간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실험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새로운 작품들이 들어서는 이 행사는, 공공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도시의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앞으로 국내에서도 공공 예술이 건축과 도시 개발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만약 런던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시티 오브 런던을 거닐며 곳곳에 설치된 조각 작품들을 감상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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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025년 3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시장 환경 등에 따라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