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 가상자산 시장의 명확한 규제 가이드라인으로 기대를 모았던 ‘클래리티 법안’이 상원 본회의 절차표결에서 최종 부결됐습니다.

  • 의회 입법이 지연됨에 따라 4분기 가상자산 규제의 주도권은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등 행정 기구로 넘어갔죠.

  • 제도권 편입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걷힌 지금, 투자자들은 외부 규제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펀더멘털과 현금흐름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생력 있는 자산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 가상자산 시장은 막대한 자본이 몰렸지만 명확한 규칙은 부족한 ‘개척지’에 가까웠습니다. 시장은 미국 연방정부 차원의 규제가 들어서면 이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9월 15일, 가상자산 시장의 규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클래리티 법안(Clarity for Payment Stablecoins Act)이 상원 본회의 절차표결에서 찬성 50표, 반대 49표로 부결됐습니다. 과반을 넘겼지만 법안 심의에 필요한 60표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클래리티 법안은 규제 사각지대에서 성장해 온 스테이블코인에 연방 차원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발행액에 상응하는 안전자산을 보유하도록 해,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와 금융 거래에 활용될 수 있는 신뢰 기반을 제도화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의회가 11월 중간선거 국면에 들어서며 연내 입법 가능성이 낮아진 만큼,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규제의 완성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시장의 룰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읽는 것입니다.

월가가 원했던 합법 화폐

전 세계가 클래리티 법안 통과에 이토록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했듯 이 법안이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도를 국가 차원에서 보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Unsplash

이 법안이 특히 올해 월가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배경에는 ‘실물연계자산(RWA) 토큰화’라는 메가트렌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국채나 사모펀드 지분 같은 대규모 전통 자산을 블록체인상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거래하기 위해서는 대금 결제를 완벽하게 뒷받침할 법적 안정성을 갖춘 스테이블코인이 필수적으로 맞물려야 하기 때문이죠.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일찍이 “다음 세대의 시장과 증권은 모두 토큰화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단언했고, 이들이 내놓은 미 국채 토큰화 펀드 ‘BUIDL’은 이미 기관 자금을 끌어모으며 그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관련 아티클)

실제로 클래리티 법안이 9월로 미뤄졌을 당시 가상자산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는 “은행들은 기다리지 않는다”며, 법안 통과 여부와 무관하게 대형 금융기관들이 이미 독자적인 토큰화 예금 발행과 온체인 결제 테스트에 착수했다고 짚은 바 있습니다.

법안이 가로막힌 이유

법안이 본회의 토론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좌초된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꼽힙니다. 가장 결정적인 뇌관은 트럼프 대통령 일가의 가상자산 사업 진출에 따른 고위공직자 이해충돌 문제였습니다.

대통령 본인과 일가가 직접 가상자산 사업과 투자에 뛰어들자 민주당은 공직자가 정책 권한을 남용해 사적 이익을 편취하는 것을 원천 차단할 강력한 윤리 규정을 요구했는데요. 공화당이 주말 사이 수정안을 내놓으며 타협을 시도했지만 민주당의 불신을 씻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협상은 결렬로 끝났습니다.

출처: 백악관

여기에 전통 상업은행 대 스테이블코인 사이의 예금 패권 다툼도 불을 지폈습니다. 기존 은행권은 스테이블코인이 디파이(DeFi) 등을 통해 보유자에게 이자나 리워드를 지급하는 구조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디지털 달러가 경쟁력 있는 수익까지 제공할 경우 전통 은행의 핵심 자금줄인 일반 예금이 대규모로 이탈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죠.

결국 은행의 예금 이탈을 막으려는 기득권 금융사와 이를 혁신 탄압이라 반발하는 크립토 업계의 줄다리기가 팽팽했던 데다 11월 중간선거까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법안은 결국 60표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코인베이스와 서클의 엇갈린 생존 공식

클래리티 법안 부결 직후 시장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주요 가상자산이 하락했고, 코인베이스와 서클의 주가도 각각 10% 이상 떨어졌습니다. 다만 단기 충격이 지나간 뒤 시장의 시선은 두 기업이 가진 서로 다른 사업 구조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출처: 구글파이낸스

코인베이스는 거래 수수료 중심의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 커스터디, 장외거래(OTC), 파생상품, 구독 서비스 등으로 수익원을 넓혀 왔습니다. 특히 미국 비트코인 현물 ETF 자산의 상당 부분을 수탁하며 기관투자자 시장의 핵심 인프라 사업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월가가 코인베이스를 평가하는 기준 역시 단순한 거래량보다 비거래 매출의 안정성과 기관 자금의 지속적인 유입 여부에 더 무게가 실리는 모습입니다.

반면 서클은 USDC 발행과 준비금 운용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이 핵심 수익원입니다. 금리 수준과 USDC 유통량이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규제 환경의 변화에도 상대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연방 차원의 제도화는 USDC가 결제와 금융 인프라로 확장되는 속도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JP모건 애널리스트들은 법안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연내 통과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고 평가했는데요. 이렇듯 규제 명확성이 뒤로 밀릴수록 두 기업이 가진 사업 구조의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시장 역시 이들을 더 이상 ‘크립토 산업의 수혜주’라는 하나의 틀로만 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코인베이스는 기관 인프라와 수익원 다각화, 서클은 USDC의 확장성이 각각 독자적인 밸류에이션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법률 대신 행정 규칙으로

11월 미국 중간선거로 의회가 사실상 휴업 상태에 들어가면서 4분기 시장 규제의 주도권은 행정 기구인 SEC와 CFTC로 넘어갔습니다.

그동안 가상자산 기업들은 명확한 기준 없이 제재와 소송을 앞세웠던 SEC의 방식 탓에 언제 불거질지 모를 법적 리스크를 안고 사업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4분기에 접어들며 업계 내부의 기류도 사뭇 달라졌는데요. 당장 새로운 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회 대신 규제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현행법 안에서 가능한 사업 영역부터 하나씩 넓혀가자는 실용주의 노선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출처: Chat GPT

실제로 시장의 숨통을 틔우는 가시적인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친(親)혁신 성향을 보여온 CFTC는 미국 최초로 비트코인 무기한 선물 상품의 거래소 상장을 승인하며 기관 투자자들이 포트폴리오의 가격 변동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열어줬어요.

이런 가운데 SEC 역시 지난 8월, 자금 조달 규모에 따라 증권 등록 의무를 완화해 주는 ‘가상자산 공모 면제 규정’과 프로젝트 주체가 핵심 경영 노력을 종료했다고 인증하면 증권성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부 세이프 하버(Safe Harbor)’를 골자로 한 공식 규칙안을 발표하고 현재 공개 의견을 수렴 중입니다. 클래리티 법안이 본회의 절차 표결의 문턱을 넘지 못한 만큼 입법 공백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이러한 행정 규칙들이 시장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자 버팀목이 될 전망입니다.

숫자로 증명하는 본질 가치

클래리티 법안의 부결은 그동안 시장에 남아 있던 제도권 편입 기대를 한층 낮췄습니다. 이제 투자자들의 시선은 규제 호재 자체보다, 외부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갖췄는지에 더 집중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업과 자산이 스스로 얼마나 견고한 펀더멘털과 현금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입니다. 포트폴리오를 점검할 때도 몇 가지 기준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규제 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실질적인 유용성을 바탕으로 온체인 매출과 수수료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글로벌 금리 인하 국면에서도 탈중앙화 금융(DeFi)이 충분한 실질 수익률을 제공하며 유동성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개별 프로젝트의 증권성 규제 리스크에 대비해 상대적으로 제도적 지위가 확립된 비트코인(BTC) 등과의 포트폴리오 균형이 적절한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이번 미국의 입법 지연은 가상자산 생태계의 체력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제 환경에 대한 기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시장이 된 만큼, 앞으로는 사업 모델의 지속 가능성과 현금흐름, 그리고 규제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자산 간 차별화를 만드는 핵심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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